(1) 그래서그랬어 작업실을 계약하다
1년만에 로그인한 먼지쌓인 브런치!
오랜만에 들어온김에 퇴사 초반에 쌓아둔 글을 읽어보았다. 어떤 문장에서는 지나칠 정도의 비장함이 느껴져서 헛웃음이 났고, 어떤 단락에서는 당시의 (극도로)불안했던 마음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그때의 내가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도 했다. 어느 새 3년전 이야기가 되었다. 시간이 흘렀고 많은게 변했다.
일단 브랜딩에 필요한 시각물들을 제작하는 외주일을 때려쳤다. 머잖아 그만둘 수 밖에 없게 되리라는 건 AI무섭다고 찡찡대던 시절부터 직감했었고... 결국 다른 생존법을 모색하기 위해 '액수가 매혹적인 작업 의뢰가 들어오더라도 고사하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게 되었다. 그렇다보니 요샌 이런 식이다 : 며칠 전 캐릭터 제작 문의가 들어왔을때, '그래픽 제작은 AI한테 시켜보시길 권해드리나, 만약 그 앞단의 브랜드 톤앤매너를 잡는 과정에서 도움이 필요하시면 그건 그냥 해드릴 수 있다'라고 답변드리고 커피챗만 했다. 이젠 클라이언트도 프로젝트도 마다하다보니, 프리랜서라는 이름표와는 거리가 아주 멀어졌다.
그래서 요즘엔 뭐하고 지내냐고요.
충무로역 인근에 자리를 잡은 작은 선물가게 겸 작업실, 그래서그랬어로 출근한다.
그렇다. 나 진짜 선물가게 사장님 됐다!
그 어느때보다도 압축적인 1년이었다.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본다.
① 그래서그랬어 작업실을 계약하다
최근에 선배랑 수다를 떨다가 둘 다 몹시 공감해서 마구 고개를 끄덕였던 포인트가 있는데, 어떠한 일(특히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은 오롯이 내 의지로 해냈다기보다는 무언가에 이끌려서 '하게 되어버린' 피동적인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내겐 고양이를 입양한게 딱 그랬고, 작업실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 딱 그랬다.
1년 전 어느 여름날 홀연히 ‘공간을 마련할 때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이후부터, 각종 부동산 어플을 깔고 내 분수에 맞는 필터, 그러니까 보증금 500, 월세 30이하의 조건을 걸고 틈날때마다 ‘확인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7월 중순즈음, 정말이지 운명처럼 충무로역 8번출구 근처의 11평짜리 매물을 단숨에 ’계약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네이버부동산에 올라온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전화를 하고 달려갔다.
이곳은 인현시장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상가건물들 중, 1층에 술집, 2층에는 이발소가 있는 3층짜리 건물의 3층 공간이다.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얼핏 듣기로는 1,2층 모두 업력이 30년 가까이 되셨고, 3층은 주로 사무실로 쓰였댔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느낌이 왔다. 적당한 사이즈, 햇빛이 예쁘게 드는 큰 창, 실크스크린 작업에 꼭 필요한 수전! 심지어는 기대도 안했던 멀끔한 회색 시트지 바닥과 흰색 콘크리트 벽까지. 아, 여기다!
내 촉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중개인도 건물주도 부동산 계약과정에서 보기 드문 좋은 어른들이었다. 크지 않은 액수의 계약에도 잔뜩 경계하고 뭐든 걱정하는 나를 재촉하거나 가소로워하는 대신, 충분히 기다려주셨고 젊은 친구가 혼자 야무지다며 기특해해주셨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계약금을 이체했다.
이렇게만 적으니까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것 같은데, 우여곡절도 물론 있었다. 마음만 앞서서 위험한 매물을 계약할 뻔도 했으니까 (관련 에피소드는 영상으로 가볍게 기록해뒀다). 뿐만 아니라 미친 가성비의 매물이었던만큼 내 돈 들여 보완해야하는 부분도 많았다. 방충망을 달고(구옥이라 샷시가 아니라서 비용이 배로 듦...), 냉난방기와 온수기를 들이고, 낡은 형광등을 걷어내고 레일등과 펜던트조명을 설치할때마다 통장이 잘게 토막났다. 그뿐이랴. 가구와 집기들은 이제 진짜 다 마련한 거겠지? 싶을 때쯤 또 다시, 또 또 다시 필요한게 생겼다.
소비통 - 나는 쇼핑을 할때 쾌감보다는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라, 지출 과정에서 느끼는 불안하고 허한 감각을 이렇게 표현하곤 한다 - 은 상당했으나, 공간 꾸미는 일은 게임처럼 즐거웠다. 여기에 노란색 스탠드가 온다면... 여기에 화분을 올린다면... 머릿속으로 물건이 채워진 모습을 상상해보고, 이리저리 배치를 바꿔보면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 때가 마침 그래서그랬어에서 판매하는 애착사물을 모두 손수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불타기 시작했을 시기와 맞물렸다보니, 처음 생각하고 구성했던 공간의 용도는 오직 '작업실' 하나 뿐이었다. 계약 직후 제대로 된 가구도 몇 없이 휑했던 환경에서도 고독하게 실크프린팅과 재봉질을 연습하다가...
내 입맛에 맞는 소품들까지 어느 정도 채워진 뒤에는, 친구들과 지인들을 차근차근 초대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맞이하고, 커피냄새와 웃음소리로 공기를 채우고, 그들을 배웅하는 과정을 작년 하반기 내내 반복했다. 공간에 내가 조금씩 묻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누군가의 방문이 익숙해졌을 연말에는 용기를 내서 일기를 쓰고 나눠읽는 소모임도 열어보고, 나와 친구가 아닌분들도 마치 친구네 집처럼 놀러오실 수 있도록 작업실 예약방문신청도 받아보았다. 덕분에 정말 한번 만나뵙고 싶었던 그래서그랬어의 단골손님(aka 그그 대주주)과도 이산가족 상봉하듯이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에 금세 친구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이 분과는 새로운 모임도 함께 열어보게 된다), 그래서그랬어에게 평소 호감을 갖고 있었던 팔로워분들과 1대 1로 만나서 한바탕 수다를 떨기도 했다.
외향성과 내향성이 거의 절반씩 섞여있는 나에게, 처음 뵙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흥분도와 긴장도가 모두 극도로 높은 경험이었다. 뒷정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팔다리가 쑤시는 날이 허다했다. 하지만 훗날 업장을 운영하려면 반드시 익숙해져야하는 일 일테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서서히 괜찮아질거라고 생각하며 셀프 훈련에 임했다.
여기까지가 대략 작년 여름부터 연말까지 공간을 구하고 그곳에서 한 일들이다. 사실상 모아놓은 돈을 훌렁훌렁 쓰기만 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어떤 돈이나 시간은 소비한다고 증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득한 나는 더이상 마냥 불안해하기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이나 빚 없이, 오로지 나의 힘으로 마련한 밑천으로 분수에 맞는 공간을 마련하고 당분간 유지해볼 각오를 했음을 충분히 기뻐했다.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몇 편에 나눠 올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