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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은 우리 기업가정신에 무엇을 남겼나(7편)

- 조선은 왜 상업을 천시했나

by 손동원

오늘 조금 어두운 얘기를 하게 됩니다. 조선에서 기업가정신을 찾는 것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것 같이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통치이념인 주자학(성리학)은 기업가정신과 거의 모든 면에서 충돌했습니다. 기업가정신이라고 하면 다양한 개념들이 연상될 것입니다. 기업가정신의 범위는 사실 넓습니다. 어떤 경우는 강호의 개별 기업가마다 기업가정신 버전이 따로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다양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례를 잘 분석해보면 다음 3가지 개념으로 모입니다. 제가 도출한 세 가지 개념은 <망(望), 의(義), 파(破)>입니다.

첫째, 망(望), 열망의식(desire spirit)입니다. 개인적 욕망, 가문을 빛내겠다는 소망,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열망 등입니다. 그래서 인내심, 가난에 대한 저항, 관행에 대한 저항 등이 나옵니다. 둘째, 의(義), 소명의식(calling spirit)입니다. 기업가정신은 인류에 대한 애정에서 나옵니다. 이 세상에 오면서 부여받은 임무를 감당하겠다는 소명의식, 세상에 공헌하겠다는 의식입니다. 사명감, 성취감, 윤리, 책임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 파(破), 혁명의식(revolutionary spirit)입니다. 이는 혁신과 변화에 대한 집념, 그리고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입니다. 새로운 기회의 발굴, 가치의 창출, 파괴적 혁신, 도전 의식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조선의 통치이념, 특히 신분제는 이 기업가정신 3대 개념과 충돌했습니다. 첫째, 열망의식을 막았습니다. 생산 주체인 백성은 아무런 욕망을 가질 수 없는 제도였습니다.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는 기회를 막아버렸고 설령 축적분이 있더라도 지배층이 다 빼앗아가도록 신분제가 조성했습니다. 둘째, 지배층은 소명의식에 둔감했으며 오직 평민들만 소명의식을 가꾸었습니다. 보부상의 투명한 경영, 윤리적 상인의식 등이 그것이며, 국가 위기 시에는 자진해서 나서는 사명감을 가졌습니다. 이는 전쟁에 평민들이 나섰던 의병의식으로 연결되어 귀중한 자산이 됩니다만, 양반 등 지배층의 소명의식은 빵점이었습니다. 셋째, 혁명의식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신분제가 강해서 세상을 바꾸고 기회를 발굴하는 통찰은 불가능했습니다. 혁명의식의 핵심이 신분제 자체가 되어야 하는 정황인데, 목숨을 건 개혁이어서 쉽게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종합적으로, 기업가정신의 뿌리로서 오직 반쪽 소명의식만 조선에 존재했다고 판단됩니다. 이 소명의식(비록 반쪽이지만) 뿌리는 귀중한 싹입니다. 이에 대해 독립적인 글을 씁니다만, 그것은 비 온 뒤 광풍제월과 같습니다. 우리가 길을 잃을 때마다 우리의 위상을 알려주는 북극성입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조선이 왜 상업을 천시하는 풍조를 갖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이제 시작해보겠습니다. 그 시작은 조선의 설계자인 정도전(鄭道傳)이 믿던 ‘숭농억상(崇農抑商)’의 철학입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개국한 인물이지요. 그는 조선의 헌법인 ‘조선경국전’에 상업에 대한 생각을 확고하게 적습니다. “백성들 가운데서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자들이 모두 공(工)과 상(商)에 종사하였으므로 농사를 짓는 백성이 날로 줄어들었으며 말작(末作)이 발달하고 본실이 피폐했다.” 한마디로 공상인들은 게으르고 이기적인 사람들이므로 그들을 농업으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편견으로 가득한 왜곡된 시각입니다만 당시 지도층에 퍼져나갔습니다. 정도전은 심지어 ‘공상세’ 부과를 제안했습니다. 그는 철학적으로 민본(民本) 사상을 중시했지만, 업(業)에 대해서는 농업만을 귀중히 여겼습니다. 인간사의 먹고사는 문제인 상업에 대해 전혀 눈을 뜨지 못했던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조선은 상업을 억제하는 제도로 가득했습니다. 시장 개설을 금지하고 상인에게 통행증을 발행하며 상업활동을 억제했으며, 부를 축적했다고 소문이 날 경우 자칫하면 재산을 뺏길 수 있다는 불안감도 만연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모험을 무릎 쓰고 재산을 축적할 욕망은 거의 없었습니다. 건국 초부터 30% 이상이 노비로 편제되었는데 이들은 세습되는 재산에 불과했기 때문에, 생산성의 주역이지만 주인의식을 갖고 열심히 일할 의욕을 키울 수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욕망이 거세되고 주인의식도 갖지 못하는 그런 불모지였던 것입니다. 기술자들도 신분 저하와 생계 불안으로 기술개발 동력을 빼앗겼습니다. 기술자는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소속되어 최소한의 대가만 받으며 천시받았으며 노동과 생산물을 착취당했습니다. 그 결과 개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기술개발 의욕이 저해되었고, 시장의 형성과 상공업의 발달이 지체되었던 것이지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철학을 바탕으로 도덕적인 국가가 부유한 국가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부(富)에 대한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정도전의 근원 사상은 성리학입니다. 이 성리학은 송나라 주자학을 그대로 받은 것입니다. 성리학의 조상은 송(宋) 사상가인 주희(朱熹)라는 인물이며, 주돈이, 정이, 정호 등이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주자학은 공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증(考證)을 위해 철저한 고서(古書) 연구를 중시합니다. 도덕철학을 강조하며 사물의 근본을 파고드는 것을 선호하는 특성도 있습니다. 통치이념으로서의 주자학의 가치도 논쟁거리지만, 이 사상이 산출한 경제 성적표는 분명하게 초라합니다. 송나라의 경우 시작 시점에서는 경제와 군사에서 압도적인 강국이고 산업혁명 500년 전 영국보다 잘 사는 국가였지만, 산업혁명 문턱을 넘은 영국에 뒤처지게 됩니다. 주자학 사상가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모두 도덕적으로 접근했던 탓으로 풀이됩니다. 사유재산 보호 같은 민법을 발달시키기보다는 천리와 인욕, 선과 악 등으로 모든 사안을 구별하면서 실제 실용적인 해결책엔 관심이 없었습니다. 역사학자인 레이 황의 견해를 따르면, 주자학의 사상은 좁게는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강조했을 뿐 개인의 사적인 이익에 대한 관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법 발달이 부진하고 도덕관념으로 법률을 대신하는 경향이 강해졌으며 결과적으로 경제적인 발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송나라는 요(거란)와 금(여진)에게 끌려다니다가 결국 원(몽골)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몽골은 가장 강력할 때 전체 인구가 200만 명에 불과한 소국이었는데, 중국 역사상 최초로 1억 명을 돌파했던 대국인 송(宋)이 그들에게 졌던 것입니다. 중국은 명나라를 끝으로 주자학을 버립니다. 그런데 조선은 중국을 따라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자학 이념을 유지하는 편에 섭니다. 숭농억상의 이념도 주자학의 상공업 멸시와 폐쇄적인 경제정책을 따른 것이지만, 중국은 이미 “농업이 공업만 못하고, 공업은 상업만 못하다”라는 새로운 인식을 취하지만, 조선은 오히려 상업 천시를 지속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조선은 왜 주자학에 그토록 집착했을까요? 그것은 청(淸) 나라에 대한 오판에서 시작합니다. 조선이 존중한 외국은 중국이 유일했는데, 청나라가 중국이란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듯합니다. 우리보다 열등 종족으로 보던 여진족(청나라)을 황제로 섬기게 된 것에 분노한 조선은 청(淸)의 시대는 곧 종료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병자호란 와중에 겪은 치욕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믿음의 근거는 역사적으로 거란 혹은 몽골과 같이 중국을 점령한 동이족 나라는 최대 100년을 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조선은 아무런 노력 없이 100년이 되기만을 기다렸지만, 100년이 지나도 청나라는 망하기는커녕 점점 더 강해졌지요.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던 조선은 망해버린 중화(中華) 문화가 조선에 남아 있다고 오히려 우기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청나라식 의복과 변발로 돌아섰지만, 조선은 오히려 상투와 옛 복장을 보존했습니다. 주자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국 유학의 정수를 조선이 보존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청나라가 강해질수록 주자학을 더욱 집착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중국은 이미 복장과 학문을 청나라 방식으로 바꾸고 서양문물도 받아들였지만, 조선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런데 주자학은 조선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닙니다. 오늘에까지 적지 않은 유산을 남깁니다. 주자학의 근원을 캐고 들어가면 ‘리(理) 철학’과 ‘도덕 지향성’이 나옵니다. 이 두 정신은 조선만이 아니라 오늘 한국인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철학이기도 합니다. 그 이데올로기는 송(宋)에서 전수된 명(明) 나라 사상인데, 하필이면 조선은 건국 당시 중국 역사에서 경제성장에 가장 부정적이고 폐쇄적이었던 명나라 제도를 도입하게 된 것이지요. 명나라의 상공업에 대한 멸시와 폐쇄적인 경제정책이 막 건국한 조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이 정신은 해방 후 한국의 국가재건과 산업화 세대를 거쳐 오늘의 문화의 구석구석에 스며들게 됩니다. 더구나 사무난적(斯文亂賊)이란 이름으로 주자학 이외의 모든 학문을 이단시하고 역적으로 몰았습니다. 조선에는 오로지 주자학만 존재하게 되면서 그 시기에 서양의 과학이나 실용이 들어갈 틈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주자학의 원리인 ‘리(理) 철학‘이란 세상을 사는 보편적 원리로써 자연의 법칙과 도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절대적 규범을 말합니다. 보편의 법칙이기 때문에 그 ’ 보편‘을 거머쥔 자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게 됩니다. 그 보편에 대한 쟁탈전은 치열하며 승자 독식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절대적 신앙과 같이 작동합니다. 조선을 지배했던 주자학에서 나온 이 ‘리(理) 철학’, 또 그 철학에 기초한 도덕 지향성은 우리 역사에서 기업가정신을 형성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에게 국가를 위한 도덕이 있고, 정의를 위한 도덕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 중기 이후 뿌리 깊이 지배했던 주자학에 의해 형성된 정서입니다. 기업가정신 측면에서 가장 큰 영향은, 강한 도덕 지향성 때문에 상업에 연관된 사욕 추구를 겉으로 드러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한국사회에서 기업가도 운동선수도 연예인도 모두 ’도덕 지향성‘에 의해 판정받습니다. 이는 서양에서 기업가에게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부담이 없는 것과 크게 비교됩니다. 그런데 도덕 지향성은 도덕적인 삶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실제 도덕적으로 산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도덕적으로 환원한다는 의미입니다. 도덕적 당위성이 무조건 우선적 판단기준이기 때문에, 누가 도덕적 당위를 장악하는지 그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이는 사욕과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 행위자인 기업가에게 자기 자신의 사욕을 적절히 감추고 도덕이라는 명분 속에서 사욕을 찾도록 유도합니다. 경제성장을 주도한 기업가들이 인색한 평가를 받았던 이유도 ‘도덕 지향성’과 관련됩니다. 도덕적 평가가 항상 중요하기 때문에 한국 역사에서 기업가들이 기여했던 공헌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정주영과 이병철 등, 각 개인의 영웅담에는 환호했지만 근본적으로 기업가를 존중하는 생각 자체가 잉태되었던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정경유착의 뿌리, 착취하는 자본가, 부품업체를 쥐어짜는 불공정행위 등으로 채색되어 항상 도덕적인 한계를 가진 주체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21세기 오늘, 조선의 주자학을 다시 돌아보는 이유는 그저 한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서 교훈을 얻고 스승으로 삼는 지혜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복거지계(覆車之戒)라고 하나요, 앞선 수레를 보고 어디서 넘어지고 엎어지는지 배워야 한다는 그 교훈 말입니다. 보부상의 상인정신에 담긴 깊은 내공을 알아채야 하며, 그것이 산업화 시기 정주영과 이병철의 마음속에 그리고 그 기업에서 밤늦도록 일했던 우리 아버지나 삼촌과 같은 일반 직원들의 마음속에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지더라도 뚫고 나갈만한 인내와 집중력도 배워야 합니다. 이는 옛것에서 새로운 지혜를 얻는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넘어 실용적 가치를 얻는 실사구시(實事求是)까지 진전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어느 것보다 높은 의식 수준은 ‘자신만의 장르’를 만들 수 있는 상태일 것입니다. 자신만의 장르는 자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정확한 반성과 청사진을 가졌을 때만 얻는 능력입니다. 한 사회가 그런 능력을 갖추려면 오랜 노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단순히 경제적 역량이 높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성숙한 문화적 의식까지 가져야만 도달하는 경지입니다. 우리 기업가정신을 찾는다는 것은 조선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교훈을 체화시키고 그 과정에서의 땀과 눈물, 그리고 천둥과 번개를 정확 이해했을 때 얻는 경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도 상업을 중시하는 개혁 사상이 있었습니다. 1776년에 나온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國富論)보다 무려 40년이나 앞서 분업과 전문화를 강조했던 담론(談論)도 있었고, 엄격한 신분제 속에서 신분이 아니라 적성과 능력을 강조했던 지성(知性)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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