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프린세스 에드워드 섬의 7-8월은 여름이다. 아침 저녁으로 한국의 초가을 날씨처럼 선선하지만, 낮에는 어김없이 한여름의 더위가 찾아온다. 아, 예외도 있었다. 비가 주륵주륵 계속 내리던 8월의 어느 날, 어찌나 춥던지 나와 아이들은 긴팔 맨투맨 티셔츠를 사서 입어야 했다. 나의 맨투맨 티셔츠에는 약한 기모 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덥기는 커녕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런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낮에는 에어컨이 필요했다.
한국에서 배꼽티라 불리는 크롭티, 아, 요즘은 배꼽티라는 말을 안 사용하나? 아무튼 크롭티는 배가 보이는 티셔츠이다. 어깨부터 내려온 천이 배꼽 바로 위까지 덮고 있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 바로 밑에서 댕강하고 잘려있기도 하다. 위쪽은 목부분이 깊게 파인 반팔이거나, 민소매이기도 하고 가는 어깨끈만 달려 있는 나시 형태인 경우가 있다. 여름 계절에 무척 시원해보이는 옷차림이다. 캐나다 PEI 샬럿타운과 캐번디쉬에서 한 달간 머무르며 흔하게 보이는 옷차림이기도 했다.
초등학생인 딸 아이도 한국에서 크롭티를 하나 챙겨갔다. 긴반팔의 후드 크롭티였는데, 나는 아이에게 검정 나시를 꼭 챙겨입이라고 한다. 배가 차가워지면 여름에 배탈이 날 수도 있고 건강상 좋지 않다는 잔소리와 함께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배가 보이는 크롭티를 입고 다니는 외국인들은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들의 배 건강을 걱정할 입장도 아니었고 배 정도의 노출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길이가 가슴을 겨우 가릴 정도가 되면 나의 마음도 아슬아슬해진다. 한번은 샬럿타운에서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대학교 주변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남녀가 버스에 올랐는데, 유학생인지 아니면 다양한 인종이 사는 PEI의 거주민인지 구별이 안되는 청년들이었다. 이스트백처럼 생긴 가방을 둘러맨 여학생의 옷차림이 유독 눈에 띄었다. 하얀색 브레지어, 브레지어? 크롭탑이라고 하기에는 모양새가 속옷을 닮은 옷차림. 해변의 비키니라면 자연스러울텐데 버스안의 옷차림이라기에는 무척 과감했다. 그녀의 과감한 노출에 신경을 쓰는 건 버스 안에서 나 혼자뿐인 듯했다.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거나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어? 말도 안돼!"
과거 70년대 한국에서는 미니스커트가 무릎부터 어느 정도 올라가 있는지 경찰들이 자를 가지고 재고 다녔다는 말에 딸아이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2020년에 사십대인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없으니 열살 남짓 아이가 생각하기에는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일일까 싶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도 한국에서도 히잡을 쓰고 다니는 이슬람 여성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복장에 대한 국가와 종교의 강요가 여전히 존재함을 느끼게 된다.
얼마전 한국에서는 공공기관 인턴이 크롭티를 입고 출근해 논란이 되었다. 나는 그 소식을 캐나다 샬럿타운 도서관에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도서관 안팎으로 다양한 옷차림의 외국인들이 지나다닌다. 한낮의 더위는 그들의 나시 차림이나 크롭티 차림을 어색하지 않게 해준다. 주로 여성들의 옷차림이 그러하긴 하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시원하게 노출이 된 옷을 입고 있었다. 한번은 나도 이너로 입던 검정 나시 하나만 입고 거리를 걸었던 적이 있다. 거뭇한 저녁 시간이었고 추위에 떠는 둘째 아이에게 윗옷을 벗어주기 위해서였지만, 한국에서는 차마 하지 못했을 행동이었다. 도서관은 일종의 공공기관인데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었다. 물론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노출이 없는 옷을 입었는데, 에어컨이 워낙 시원한 이유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에서 한 시간 이상 있으면 추워서 가져간 바람막이 점퍼를 입어야 했으니까. 나처럼 도서관에서 몇 시간을 있는 사람들은 두툼한 점퍼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캐나다에서는 크롭티를 입고 출근해도 괜찮을까? 나는 궁금해졌다.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 샬럿타운 숙소의 호스트인 헤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헤더는 나의 이런 질문을 늘 반갑게 맞아주어서 고마웠다. "안녕하세요, 헤더. 오늘은 숙소 이외의 질문이 있어서 연락드립니다. ..... 캐나다에서는 크롭티를 입고 출근해도 되나요? ... "
그녀의 친절한 답변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작업복은 확실히 캐주얼해졌어요. 하지만 여전히 직장이나 사무실, 회사에서 일정한 복장이 요구됩니다. 교사는 청바지를 입고 출근할 수 있지만 구멍이 뚫린 청바지와 크롭탑은 입을 수 없을 거예요. '비즈니스 캐주얼'이라고 불리는 수준에서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변호사나 의사실에서는 절대로 크롭탑을 볼 수 없습니다. 반면에 여름에 상점이나 사업장에서 일하는 계절 노동자들이 크롭티를 입은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옷을 판매하는 옷가게에서도 크롭티를 입은 직원을 볼 수 있겠지요. 때로는 캐주얼한 레스토랑의 경우 크롭탑 스타일의 옷을 입을 수 있어요. '힙하고 현대적이며 젊다'고 브랜딩하는 회사의 경우는 젊은 직원들이 원하는 옷을 입게 허용하지만, 전문적인 직업 환경에서는 크롭탑을 입을 수 없어요."
그랬다. 캐나다의 직장 문화도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도 공공기관에서 크롭티를 입고 출근하면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내가 관광객으로서 보았던 사람은 나와 같은 관광객이거나, 상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옷차림은 매우 자유로웠으며 노출도 과감할 수 있었다. 내가 캐나다에서 경험한 공공기관 성격의 몇 안되는 장소, 즉 도서관이나 공항 등에서는 제복을 입거나 비즈니스 캐주얼 선에서 옷을 입은 직원들만 볼 수 있었다.
사실 이 날 나는 헤더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했었다. 아빠가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매우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캐나다에서는 아빠가 양육을 담당하는 경우가 흔한지 궁금했다. 헤더는 자신의 남동생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해주었다.
"육아와 집안일은 주로 여성이 담당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고 있어요. 예를 들어, 내 남동생은 모든 요리를 하고, 그의 아내는 청소를 담당해요. 둘다 정규직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데,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에 아내는 육아휴직을 내고 집안일과 육아를 담당했어요. 아내가 회사에 복귀한 이후에는 남동생이 육아휴직을 내고 집안일과 육아를 담당했어요. 아직도 여성이 집에 머무르는 전통적인 가정이 많지만 점점 더 많은 여성이 일을 하고 있어요. 결혼한 남녀의 역할에 대한 부분은 전적으로 그 사람들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집안일이나 육아 분담에 대한 부분도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도 전통적인 가정의 형태는 남아있지만, 결국 부부의 역할 분담은 전적으로 부부 사이의 결정에 달려있지 않는가. 헤더와의 대화는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중요한 부분을 꼬집어 주었는데 바로 이것이다.
"요즘 샬럿타운 주변을 걷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관광객일 거예요. 가족들과 함께 휴일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일할 필요가 없는 아빠들이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일 거예요."
아차! 그랬다. 샬럿타운의 여름은 최대 관광철이었고, 지금 이곳에서 내가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관광객일 것이다. 아빠와 자녀가 함께 있는 가족의 경우 휴가를 즐기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래서 오전 10시에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고, 오후 3시에 아이들과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일지도. 과감한 노출의 옷차림, 아빠와 함께 있는 아이들, 이런 모습은 이들이 관광객이라서 가능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이곳에서는 내가 어떤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어떤 잣대를 들이밀며 판단할 사람들이 없다는 점이다. 대학가를 지나던 버스 안에서 보았던 여학생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것처럼. 웃통을 벗고 시내를 조깅하던 남자를 아무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던 것처럼. 탱크탑과 핫팬츠를 입고 뛰는 중년과 노년의 여성들이 어색해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그녀들의 건강미가 아름다워보일 뿐이었다.
나의 목적에 맞게 옷을 입고, 장소에 맞게 옷을 입으면 될 일이다. 운동할 때는 편안하게, 직장에서는 단정하게, 휴가지에서는 자유롭게! 캐나다든 한국이든 사람이 사는 곳에서의 옷차림 규칙은 비슷한 것 같다. 그리고 같은 장소를 지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곳이 운동을 위한 장소가 될 수 있고, 직장이 될 수도 있으며, 휴가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나와 다른 옷차림의 누군가를 보며 섣불리 판단하지 않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