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와 함께 오랜만에 춘천으로 여행을 갔다. 거창하게 여행이라고 칭하기 어려운 당일치기 여행이었는데, 우리의 목적지는 춘천애니메이션 박물관 옆의 로봇박물관이었다. 몇 달 전 둘째 아이와 둘이서 다녀갔었는데, 그 뒤로 아이는 생각이 날때마다 로봇박물관을 이야기했다. 마침 아무 일정이 없는 토요일이라 두 아이 모두를 데리고 춘천으로 향했다. 외부 놀이터도 개장한 상황이라 더욱 신나게 놀 수 있었다. 몸이 노곤해질때까지 놀던 두 아이는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배가 고프단다.
신나게 놀아서 쭈욱 빠진 에너지를 채우러 근처 닭갈비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서 조금 늦은 저녁으로 닭갈비를 해먹을까 했는데, 춘천에서 먹어야 제맛이라는 첫째 아이의 말에 춘천 음식점에서 먹기로 했다. 곁들여 나온 상추쌈에 양파조각과 쌈장, 그리고 닭갈비 볶음을 얹어서 오물오물 잘도 먹는다. 아이들의 입과 손이 바쁘게 움직이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흐믓하다.
둘째 아이는 여느 저녁 식사보다 조금 더 많이 먹는다. 역시나! 아이에게는 '하루 섭취 총량 일정의 법칙'이 존재한다.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간식을 포함해 하루에 섭취하는 양이 일정한 편이다. 이날은 아침을 유독 적게 먹어서 아빠의 걱정어린 잔소리를 한 움큼 들은 후였다. 하루 종일 먹은 양의 총량은 어느날이나 거의 비슷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잘 먹지 않는 아이를 보면 걱정이 되는게 부모의 마음이다.
식탐이 없는 둘째 아이는 정확히 자신이 섭취할 양만큼을 먹는다. 하루 세끼마다 먹는 양이 다를 뿐이지 하루를 기준으로 셈하면 신기할 정도로 고른 양을 먹는다. '하루 섭취 총량 일정의 법칙'에는 간식도 포함이 되기에 영양가 높은 식사를 위주로 먹을 수 있도록 간식의 양도 조절해야 한다. 아주 가끔, 간식을 평소보다 많이 먹어서 식사를 적게 먹는 아이를 보면 속상해진다.
둘째는 활동량이 많고(신기하게도 하루 종일 움직인다!) 식탐이 없는 남자 아이라서 마른 편이다. 지인 중에는 우리 아이처럼 마른 남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있는데, 주변에서 아이가 너무 말랐다며 잘 먹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상하다고 한다. 심지어 또래보다 키가 큰 편이고, 집에서 잘 챙겨 먹이는데도 그런 말을 들으니 스트레스란다. 요즘은 남자들도 슬림한 몸매를 선호해서 운동과 다이어트를 하는 시대이다. 어렸을 때 살이 쪄서 체세포 갯수가 늘어나면, 성인이 되어서 살을 빼기에 힘들다고 한다. 건강하고 마른 몸매가 걱정할 일은 아닌 듯하다.
춘천 음식점에서 닭갈비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밤 시간이다. 아이들과 나는 씻고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첫째 아이는 자기 방에서 혼자 잠이 들고, 나는 둘째 아이의 방에서 함께 잠을 잔다. 둘째 아이가 혼자 자는 걸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건너 방에서 첫째 아이의 잠꼬대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문장을 짜증을 섞어서 말하더니 엄마는, 이라고 말하며 화를 낸다. 역시나! 오늘 밤 왠지 첫째 아이가 잠꼬대를 할 것 같았다. 첫째 아이는 낮에 마음이 힘든 일이 있으면 자는 동안 잠꼬대를 하는 '잠꼬대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
춘천 구봉산 카페거리에 있는 스타벅스를 갔었는데, 그곳에서 첫째 아이와 조금 다투었다. 여기서 상세히 설명하기는 어려우니, 원칙의 적용과 융통성에 관한 문제라고 해두겠다. 아이의 말을 들어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어른과 아이의 언쟁에서 우위를 가지는 건 어른이다. 그래서 아이는 상처를 받았다.
"아..그..."
아이는 계속 잠꼬대를 했다. 짜증과 화를 섞어가면서. 기억이 나지 않아 '아'와 '그'로 표현할 수 밖에 없지만, 여러 문장을 중얼거렸다. 나는 둘째 아이 방을 나와서 첫째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깨지않도록 조심하며 꼬옥 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미안해, 많이 속상했지, 엄마가 미안해..." 아이는 나의 목소리를 듣는 듯 조용해진다. 마치 잠에서 깨어 눈만 감고 있는 것처럼. 신기하게도 이렇게 토닥이며 대답을 해주면, 아이의 잠꼬대는 더이상 계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더 신기한 일은 아침에 잠에 서 깬 아이에게 물어보면 전혀 기억을 못한다는 점이다.
비단 아이들뿐이겠는가,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법칙이 한 가지 이상 존재한다. 나의 경우는 요리와 청소같은 집안일을 할 때 이어폰을 꽂고 일하는 것이다. 몸은 기계처럼 일을 하고 정신은 이어폰 너머의 세계를 즐긴다. '몸과 정신 분리의 법칙'이라고 이름 붙여야겠다.
십일 년 전 친정 엄마가 콧노래를 부르면서 음식을 하는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지금의 남편을 처음으로 집으로 초대하는 날이었다. 서로를 결혼 상대로 점찍고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는 자리였다. 예비 사위와 함께 먹을 음식을 만들며 콧노래를 부르는 엄마를 보며 그때의 나는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었다. 정성들여 음식을 준비하신 건 시댁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처음으로 시댁에 인사를 가던 날, 진수성찬이라는 단어를 뛰어넘는 상차림을 맛볼 수 있었다.
그때는 맛있게 감사하게 잘 먹었고 기분이 좋았고 그뿐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내 살림을 시작하면서 요리가 이토록 다리가 아픈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서서 재료를 손질하고, 서서 음식을 만들고, 서서 설거지를 하고, 서서 하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두 시간쯤 서서 일하고 나면 다리도 허리도 뻐근해지곤 한다. 요리에 이어 집안 청소와 정리를 시작하면 몇 시간이 뚝딱 지나갔다. 어떤 날은 집안일을 하다가 죽어버릴 것 같은 강한 우울감도 느꼈다. 정갈하고 가지런히 만들어진 음식, 따뜻한 햇살이 묻어나올 것 같은 인테리어, 결혼 전 내가 보아온 그것들은 중노동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누군가는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할 것이다. 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으니 모두에게 힘든 일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혼자 해내야만 하는 어렵고 지루한 의무였다.
가사노동을 시작한 지 십 년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몸과 정신 분리의 법칙'이었다. 집안일을 시작하기 전, 핸드폰으로 드라마나 오디오북을 재생한 뒤 블루투스로 연결된 무선 이어폰을 한 쪽만 귀에 꽂는다. 집안일을 하는데 필요한 적정량의 정신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소리 너머의 세계로 보낸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집안일은 큰 정신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소와 집정리는 기계적으로 손과 발이 움직여진다. 요리도 새로운 조리법에 도전하는 일이 아닌 이상 정신보다는 몸이 담당할 일이다.
몸과 정신을 분리하며 집안일을 하면서부터는 그 시간이 힘들지 않다. 오히려 즐거운 시간으로 변했다. 재밌는 드라마와 오디오북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일부러 집안일 하는 시간이 아니면 특정 드라마와 오디오북을 듣지 않으려 한다. 그래야 집안일을 하고 싶어지니까. 가끔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드라마나 오디오북을 마저 듣기 위해 추가로 일을 찾아서 하기도 한다.
'하루 섭취 총량 일정의 법칙'을 가진 둘째 아들, '잠꼬대의 법칙'을 가진 첫째 딸, 아이들은 먼 훗날 각자가 선택한 예비 배우자를 '몸과 정신 분리의 법칙'을 가진 엄마에게 소개해 줄 것이다. 그날이 되면 나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차리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하지만 마음뿐,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 같다. 예비 사위와 며느리의 식성에 맞는 훌륭한 음식점을 검색할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정성을 다음 두 가지에 쏟을 것이다. 아이들의 배우자가 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법칙을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정해주는 것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