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 공항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만석이란다. 기내 캐빈이 부족할 수 있으니 위탁 신청자는 접수하라는 안내가 들려왔다. 탑승 시각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는데, 만석이라 그런지 그 줄이 무척 길었다. 나는 이번에도 아이들과 줄을 서는 대신 가장 마지막에 탑승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게이트 앞쪽 테이블에 그대로 아이들과 앉아 있는다. 남은 모든 사람들은 줄을 서달라는 안내가 나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 zone 2 탑승하겠습니다..."
zone1에 이어 zone2 티켓 소지자에게 탑승하라는 안내가 나온다. 엇? 나는 티켓을 확인하고 아이들과 게이트로 향했다. 숫자 2가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게이트를 통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우리는 곧바로 통과할 수 있었다.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뒤로 한채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날 우리가 예약한 클래스는 프리미엄 이코노미였다.
에어캐니다 항공은 퍼스트 클래스가 없고, 비즈니스, 프리미엄 이코노미, 이코노미로 구분되어 있었다. 우리는 한국과 캐나다를 에어캐나다 항공을 이용해 왕복했다. 출국 때는 이코노미 클래스를, 입국 때는 프리미엄 이코노미 클래스를 이용했다.
출국 때는 이코노미 클래스 가장 앞 좌석을 이용했는데, 바로 앞에 프리미엄 이코노미 좌석이 있었다. 통로가 제대로 가려지지 않아서 고개를 들면 앞쪽의 모습이 보였다. 이코노미 클래스는 좌석배치가 3-3-3 이었다. 프리미엄 이코노미 클래스는 2-3-2 였다. 하지만 조금 더 넓은 좌석은 부럽지 않았다. 아이들 몸집이 작아서 이코노미 좌석의 폭이 불편하지 않았고, 가장 앞 자리라서 다리 공간도 괜찮았다. 뒷 자석이 180도 젖히지 않는 건 두 클래스 모두 마찬가지 아닌가.
창 밖 풍경을 보고 싶어하는 아이들에게는 3자리 연석이 창가쪽에 있는 이코노미 클래스가 오히려 나은 것 같았다. 그런데 딸그락 딸그락 소리에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앞 쪽 승객들이 하얀 도자기 식기에 담긴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심지어 생야채로 만든 샐러드가 보였기 때문이다. 아, 불필요한 시각정보였다. 앞 자리의 편안함을 느끼려고 예약한 자리였는데, 한 등급 높은 클래스의 서비스를 강제로 목격해야하는 자리가 되었다. 귀국할 때는 저 자리에 앉아서 일회용 용기가 아니라 도자기 식기로 밥을 먹어야지, 한 달 뒤 비행기에서 경험하고 싶은 목표가 생겼다.
캐나다 PEI 샬롯타운과 캐번디쉬에서 한 달동안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귀국하는 비행기, 프리미엄 이코노미 클래스는 이코노미 클래스와 생각했던 것보다 여러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긴 줄을 서지 않고 곧바로 탑승할 수 있는 편안함도 그중 한 가지였다.
출국할 때와는 다르게 입국할 때는 PRIORITY 라는 표식을 위탁 수화물 바코드 사이에 끼워주었다. 상위 클래스에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인데 일반석의 경우 추가 요금을 지불하고 구매할 수도 있다. 이 표식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수화물 처리가 되어, 좀더 빠르게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만석인 비행기에 탑승해서도, 거의 기다리지 않고 수화물을 찾을 수 있었다.
이코노미 좌석에 앉아서 상위 클래스를 강제 목격해야했을 때, 물병이 하나씩 놓여있는 걸 보았다. 저게 뭐라고, 괜히 목이 마른 기분이었다. 프리미엄 이코노미 좌석에 앉으니 물병과 함께 검정 파우치가 보였다. 칫솔과 치약, 귀마개, 안대, 양말이 들어 있었다. 가방 속 깊숙히 넣어둔 칫솔과 치약을 꺼낼 일이 걱정이었는데 검정 파우치가 반가웠다.
프리미엄 이코노미 좌석에 앉아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점은 불빛등을 켜도 다른 사람 눈치가 안보인다는 점이었다. 어둑한 비행기 안에서 모두가 불을 켜지 않은 채 모니터와 핸드폰을 이용하고 있었다. 나는 노트북으로 글을 쓰기 위해 천장에 달린 좌석등을 켰다.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혹시 다른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할까봐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통로 건너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 같지 않아서 안심이 되었다. 이코노미 좌석에서는 등을 켜면 통로 옆 사람이 작은 반응을 보여서 미안하고 조심스러웠다.
두 아이가 가장 만족했던 점은 모니터와 리모컨이었을 것이다. 이코노미 좌석에도 모니터가 있지만, 리모컨이 없다. 리모컨은 뒤쪽에 게임기 기능을 하는 버튼이 있었다. 집에서 핸드폰도 게임기도 없이 생활하던 아이들이었지만 어찌나 재밌게 게임을 하던지. 그 모습이 영락없는 게임광이었다.
프리미엄 이코노미 클래스는 비즈니스와 이코노미의 중간 형태이다. 그래서 식사도 한 번은 비즈니스 클래스처럼, 한 번은 이코노미 클래스처럼 제공된다. 딸그락 딸그락 하얀 식기에 밥을 먹고 싶은 로망을 한 번 경험한 뒤, 다음 식사는 일회용 용기에 담겨진 잡채를 먹었다. 잡채도 정말 맛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식기에 담아 먹으면 더 맛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테인레스 커트러리와 일회용 나무 커트러리를 사용하면서, 문득 나무 호미로 돌밭을 매던 콩쥐가 떠올랐다. 팥쥐는 쇠 호미로 모래 밭을 매었더랬다. 동화 속에서 콩쥐는 밭 매기에 성공한다. 어떻게? 검은 소가 나타나서 콩쥐를 쉬게 하고 대신 밭을 갈아 주었다. 옛날 이야기는 모두 이런식이다. 착한 주인공은 평범하지만 늘 하늘의 운을 받는다. 아니면 범상치 않은 재주꾼이거나. 금수저도 아니고, 로또 운도 없고, 특별히 뛰어난 재주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전래동화에서 답을 찾기 힘든 문제다.
아이를 키우며 전래동화를 읽어주는 일은 필수 과제이기도 하다. 평범한 주인공이 짜잔하고 운이 좋아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되는 이야기, 조건은 오직 주인공의 착한 성격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착하다'는 가치는 동화 속에서처럼 교환 가치가 높지 않다. 착하다고 무조건 행운을 얻거나 성공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동화 속 이야기'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동화 밖으로 나오면 이야기가 되지 않으니.
평범한 나는 나무 호미로 돌밭을 매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검은 소가 어디서 뿅하고 나타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현실적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무 호미가 부러지지 않도록 살살살 할 수 있는 만큼 밭을 일구는 게 최선일까. 팥쥐엄마에게 나무 호미를 쇠 호미로 바꿔달라고, 그게 아니면 돌밭을 모래밭으로 바꿔달라고 항의라도 해야할까. 특출난 사람이라면 나무 호미를 쇠 호미로 바꾸는 연금술사가 되겠지만, 평범한 나에겐 어려운 일이다.
비행기는 클래스로 구분된다. 이번 캐나다 여행을 위해 왕복 2대씩, 총 4대의 비행기에 탑승했다. 지불한 항공권 요금에 따라 극명하게 구분되는 공간과 서비스, 그것은 마치 사회 계급의 축소판 같았다. 사실 클래스(class)는 계급(class)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일등석, 비즈니스석, 일반석이라는 단어는 일등 계급, 비즈니스 계급, 일반 계급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십 여년 전 사회학 수업에서 배웠던 마르크스의 계급론이 떠오른다. 돈을 좀더 내면 쉽게 상위 클래스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는 베버의 계층론이 적합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만큼의 돈을 버는 일이 그리 쉬운가.
캐나다는 '사다리가 없는 나라'라고 한다. 굳이 사다리를 타고 상위로 이동하지 않아도, 현재 위치에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나라라는 의미이다. 한편으로는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교육열이 높지 않은데 '졸업장'이 주는 경제적 이득이 크지 않기 때문이란다.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의 교육열이 높은 이유는 사다리에 오를 수 있는 티켓이기 때문이다. 직업에 따라서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정도와 얻는 수입이 달라진다.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하는 이유이다.
비행기 클래스는 서로 다른 등급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게 원칙이지만, 통로를 가린 커튼으로는 완벽하게 가려지지 않는다. 이코노미 좌석에 앉으면 바로 상위 등급인 프리미엄 이코노미 좌석이 살짝 보인다. 하지만 더 멀리 있는 비즈니스 좌석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니 그 존재를 알더라도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눈 앞에서 하얀 식기에 담긴 음식을 딸그락거리며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쪽으로 옮겨가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이동을 위해 추가해야 하는 요금이 크지 않으니, 사다리를 건너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진다.
당신도 올라 올 수 있다며 위쪽 세상을 조금 맛보여 주는 것, 사다리 오르기 게임의 작동 방식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사다리가 눈에 보이니 오르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이 많다. 비록 점점 사다리의 갯수가 줄어들고 있을지라도, 눈 앞의 사다리의 유혹은 무척 강렬하다. 손에 잡힐 것 같고,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사다리는 사람들을 들끓게 만들고 에너지가 넘치며 생동감있는 사회를 만든다. 캐나다에 대한 책에서 읽은 내용 중에, 캐나다는 심심하다는 표현이 있었다. 사다리에 오르려는 들끓는 에너지가 없으니, 평온하고 한편으로는 심심하기까지 하단다.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삶일까?
나의 이십 대를 돌이켜보면 들끓는 에너지로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을 했던 적도 있다. 사십 대가 된 지금은, 남들과 경쟁하는 삶보다 평온하게 하루를 꼭꼭 씹으며 음미하는 삶이 더 행복하다. 경쟁에 들여야 하는 에너지가 아깝고 그러한 상황이 피곤하다. 사다리에 매달려 한 칸 한 칸 오르기 위해 애쓰는 시간보다, 지금 나의 위치에서 아이들과 소소한 기쁨을 누리는 시간이 더욱 가치있다. 캐나다로 가서 살아야하나? 우스개소리다! 나의 터전이 이곳 한국에 있는데 어딜 간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확신이 좀더 생겼다. 경쟁하지 않고 주어진 것들에 만족하는 안온한 삶을 살아도 된다는 확신이.
이렇게 마무리를 하면 의문이 남을 것 같다. 프리미어 이코노미 클래스의 서비스에 감탄하던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 다음부터는 상위 클래스를 이용해야겠다는 식의 결론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왠지 그게 자연스러운 결론일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그렇게 단순한 일직선이 아니다. 이제부터 의문에 대한 설명을 해보겠다.
산이 가파르거나 완만하다고 해서 그것의 옳고 그름이나 우위를 따지는데 골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계급이나 계층 등 경계에 대한 문제가 여전히 사회학자들에게는 관심사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산의 생김사와 마찬가지다. 사회가 그렇게 생겼다고, 클래스가 나뉘어 있다고 해서 문제삼고 골똘하고 싶지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 그렇구나하고 생각할 뿐이다.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르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래를 내려다 보는 그곳의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봉우리든, 골짜기든, 산자락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어디든 가족들과 지인들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곳이면 만족스럽다. 어느날은 봉우리에도 가보고, 골짜기에도 가보고, 산자락에도 가볼 것이다. 그곳의 색다른 맛에 감탄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갖기 위해 모든 걸 걸고 애쓰고 싶지는 않다. 반대로 모른채 하거나 갖지 않기 위해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가며 닿게 되는 곳, 그곳에서 주어지는 것들에 만족하고 또 하루를 살아내고 싶다.
다음 여행에서 상위 클래스를 선택할지 아닐지는 벌써부터 목표로 삼을 일이 아니다. 다만 그때가 되어서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선택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어느 클래스가 되었던 여행지로 향하는 그 시간은충분히 즐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