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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동운 Don Ko Jun 09. 2023

아내의 졸업

일상에서...

10년 전, 새벽에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된 일이다. 한밤중 또는 새벽에 오는 전화는 대개는 불길한 소식이다. 세미가 교회 수련회에서 팔이 부러졌을 때도, 어머니가 거실에서 넘어져 머리가 깨어졌을 때도 새벽에 전화가 왔었다.


전화를 받은 아내가 바로 울음을 터트린다. 장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는 서울의 처남댁에게서 온 것이었다. 주말에 회사에 나간 처남이 의식불명으로 발견되어 지금 혼수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서둘러 아내가 서울로 나갔지만, 처남은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처남에게는 9살 딸과 7살의 아들이 있었는데, 일 년 후 아이들은 미국에 와서 우리와 살게 되었다.


영문도 모른 채 아빠를 잃고 엄마와 떨어져 8살에 미국에 온 준이가 어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아내도 졸업을 했다. 준이는 초등학교 4학년, 민서는 5학년에 시작해서 이제껏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등하교는 물론 아이들이 필요한 곳이라면 시간과 장소를 따지지 않고 아내가 데리고 다녔다. 민서가 학교 급식이 싫다고 해서 도시락도 싸 주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스쿨버스가 제공되었지만,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고 정거장에서 차를 기다리는 등 불편함이 있다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남의 자식 키우기는 내 자식 키우기보다 훨씬 힘들다는 것을 나는 겪어보고 알게 되었다. 성격과 정서가 다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의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고치려 한다고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아이들 키우던 방식을 고집하는 나와 습관과 정서가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아내가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힘들었던 것만큼 아이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나이 많은 고모부와 아이를 키워 본 적이 없는 고모에게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아이들이 남의 자식이듯, 나는 아이들에게 남의 부모다. 내가 도와주긴 했지만, 한국의 초등학교에서 배운 영어로 학교의 수업을 따라가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잘 적응해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준이의 졸업을 보며 사람들은 우리에게 힘든 일 했다고, 장하다고, 칭찬과 덕담의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런 말은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준이와 민서 또는 아이들 엄마가 건네는 진심 어린 한마디 감사의 말이 백 사람의 칭찬보다 우리에게는 더 간절하다.


자식은 부모가 키워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자식은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이 맞다. 내 것과 남의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될까? 아마도 우리는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이 기구한 인연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여보, 수고했어. 졸업을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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