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내가 미국에 가서 한의사를 하기를 원하셨다. 미국에서는 한의사는 의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한약은 보조식품으로 거래가 되며, 보험으로는 커버가 되지 않는다. 침구사는 의료인으로 인정을 하며, 침은 보험으로 커버가 된다. 그래서 미국의 한의사들은 침구사 자겨증으로 영업을 하며, 한약은 보조식품으로 판매를 한다.
경희대학 침구과 교수에게서 과외수업으로 침을 배웠다. 아버지도 함께 배웠다. 기본적인 침구 이론을 배운 후에는 혈을 찾아 침을 놓는 방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이불과 베개에 침을 놓는 연습을 하고, 그다음에는 내 종아리에 침을 놓아 실습을 했다. 얼마 후에는 동생이며 양계장과 식당의 종업원들에게도 침을 놓아주었다.
아버지가 연신네 시장 사람들에게 소문을 놓아 할머니 몇 분이 침을 맞으러 오기도 했는데, 효과를 보았다며 비싼 미제 파인애플 깡통을 사다 주기도 했다. 침은 사람에 따라 증상에 따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침을 익힌 후에는 한약 짓는 방법을 배웠다. 나이가 지긋한 한의사 노인에게서 한약재 사용법과 약 짓는 방법을 배웠다. 마치 요리에 레시피 북이 있는 것처럼, 한약도 처방전이 적힌 책이 있어 병과 사람에 따라 사용하는 처방이 있으며 그대로 정해진 분량의 약재를 넣으면 약이 된다. 아기를 낳은 교우의 언니에게 보약을 지어 주기도 했으며, 쌍화탕 정도는 내가 조제해서 마시기도 했다.
아버지의 뜻과 달리 나는 한의학에 큰 관심이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여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고 단기에 과외로 배운 것이라 자신도 없었고, 마치 내가 사이비 의료인으로 행세하는 것 같아 계속할 뜻이 없었다.
미국에 이민을 오니 침구사 양성 학원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소규모 신학대학들도 인기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낮에는 궂은일을 하면서 밤에는 한의 학교나 신학교에 다니며 꿈을 키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게 생활비를 대 줄 테니 공부를 더 해서 한의사가 되기를 권했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미국에는 누나가 제일 먼저 가고, 부모님, 그리고 동생들 순서로 갔다. 그리고 나는 내 차례를 기다리며 한동안 서울에서 살았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 부장이던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등장한 전두환의 신군부. 나는 그 무렵 교회 청년부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용돈도 벌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였다. 새로 득세한 신군부가 모든 형태의 과외공부를 금지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를 엄벌에 처하겠다는 것이었다. 한두 명이 동요하더니 결국 영어 과외는 없어지고 말았다.
미국에 먼저 가신 부모님은 LA 에 큼직한 이층 집을 사고, 한인타운에 ‘삼복정’이라는 식당을 차렸다. 그 후 내게 들려오는 미국의 소식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내가 미국 이민 비자를 받을 무렵에 아버지 외사촌과 오촌 아저씨가 나를 찾아와서 미국 사정을 들려주었다. 가게는 문을 닫게 생겼고, 집도 팔아야 하는 형편이며 아버지의 사정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미국 이민을 너무 쉽게 생각하셨던 것 같다.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하는 한인타운에 번듯한 식당을 차리면 ‘벽제갈비’처럼 손님이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우선 미국에서는 새로 비즈니스를 차리는 과정이 복잡하다. 미국 공무원들은 매우 천천히 움직인다. 새로 업소를 차리기 위해서는 각종 허가와 면허를 받아야 한다. 아버지의 바쁜 마음과는 달리 개업 날짜가 몇 번이나 미루어진 후에야 문을 열 수 있었다.
이민 사회의 특수성도 사업 실패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사회적 지위나 경력 따위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모두가 계급장 떼고 맞먹는 식이었다. 주인이라고 해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부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주인이 직접 칼을 들고 주방 일을 하는 식당과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머리를 조아리고 낮은 자세를 취하며 손님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이런 환경에 익숙지 않았다. 늘 ‘고 대령,’ ‘사모님,’ 소리를 들으며 살던 분들에게 이민 사회는 차갑고 냉혹했던 것이다. 내가 미국 이민 비자를 받았을 때, 아버지는 식당을 헐 값에 팔아넘겼고, 집도 팔려고 내놓은 상태였다.
1981년 3월, 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나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