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나이가 동갑인 아저씨가 있다. 그는 아버지의 5촌 아저씨의 아들, 아버지에게는 6촌 동생이다. 아버지가 북진을 하여 고향을 찾았을 때, 자경대를 이끌며 아버지를 맞았던 이가 바로 이 5촌 아저씨였다.
아기가 생기면 그 부모는 첫아기의 엄마 아빠로 불리게 된다. 내게는 누나가 있어, 사람들은 부모님을 '남희 아버지, 남희 엄마'라고 불렀는데, 유독 아버지의 5촌 아저씨는 '동운이 아버지, 동운이 엄마'라고 불렀다. 내가 장남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저씨네 집은 형편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등록금이 부족하거나 하면 아버지를 찾아오곤 했었다.
어려서 난 그를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나이가 동갑인데 무슨 아저씨. 늘 그를 ‘응하’라고 불렀다. 난 늘 그를 한편으로는 부러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쟁 상대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가 기타를 치며 어니언스의 '편지'를 부르는 것을 보고 나도 기타를 배웠다.
그와 친해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이 되고 난 다음의 일인 것 같다. 그가 들려주는 이런저런 이야기는 내게는 참으로 신선하고 부러운 이야기들이었다.
공군사관학교로 진학하기를 꿈꾸고 있던 그에게 마른하늘의 날 벼락같은 일이 벌어지고 만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어머니를 도와 어린 동생들을 거두어야 하는 책임이 주어 진 것이다.
그는 벽제의 우리 집에 와서 동생의 공부를 도와주고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지내다가 얼마 후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 외사촌의 회사에 입사를 했다. 그는 그곳에서 평생의 반려자인 지금의 아내를 만난다.
그 무렵부터 그는 나를 거두어주기 시작했고, 나는 그를 아저씨로 대접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는 그의 등에 업혀 동대문 야구장에 가서 난생처음 고교야구를 보았고, 오랜만에 영화관에 갔으며, 처음으로 바다에 가기도 했다. 어느 날 그가 낙산으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나는 매우 소심한 아이가 되어 감히 나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나의 입장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자기가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겠노라고 하더니 정말 허락을 받아 왔다.
우리는 라면과 꽁치 통조림을 사들고 고속버스에 올라 낙산으로 갔다. 2박 3일 민박집에 묵으며 낮에는 바다에 들어가고 밤에는 모래밭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그것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직 마지막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바닷물에 몸을 담갔던 기억이다.
그는 나와 비슷한 무렵에 결혼을 했고, 아들도 한 살 터울로 낳았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미국으로 떠났다. 학력과 지연을 중요시하는 한국사회에서 그는 밝은 미래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역회사에 다녀 미국에 갈 수 있는 비자를 가지고 있던 그는 아내와 아들을 놓아둔 채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다.
몇 년 후, 나는 미국에서 그를 다시 만났으며 그는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며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조카인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내가 오던 해 독립기념일에는 로즈보울에 데리고 가서 불꽃놀이를 보여 주었고, 밴에 태워 라스베가스에 다녀오기도 했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LA 에 와서 친선경기를 했을 때는, 전반전이 끝나고 휴게시간에 그가 운동장에 뛰어들어 멋진 응원전을 펼쳐 한인신문에 크게 보도된 적도 있었다. 그는 양정고 응원단장 출신이다.
아저씨는 한동안 혼자 힘들게 지냈는데, 아내가 한국의 삶을 정리하고 어린 아들과 함께 미국에 들어와 다시 한 가족이 되었다. 그의 아들은 미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장교가 되어 아버지의 꿈을 이루어 주었고, 아저씨는 세탁업으로 크게 성공하여 영화에 나올법한 큰 저택에서 살며 이제는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와 나의 삶을 보며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네 인생에는 오르막 길이 있고, 내리막 길이 있으며, 음지는 양지가 되고, 양지는 음지가 된다. 누구를 너무 부러워할 것도 아니며, 내 삶을 한탄할 일도 아니다.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다 보면 울게 되는 날도 있고, 웃을 수 있는 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