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찌방 라면

by 고동운 Don Ko

미국에 오니 동생들이 모두 차를 운전하고 있어 외출이 수월해졌다. 길에 다니는 다양한 차들. 그 차들의 제조회사와 모델 등을 모두 한눈에 알아보는 동생이 존경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한국에서는 돈을 주고도 택시 타는 일이 힘들었다. 일행이 손을 들면 서려고 다가오던 빈 택시가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는 그냥 휑하니 가버리곤 했다. 미국에 와서는 후에 북가주로 출장을 다니며 가끔씩 택시를 타곤 했다. 본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는 관광도시답게 장애인 택시제도가 잘 운영되고 있었다. 장애인을 태우면 정부가 별도로 보조금을 주기 때문에 장애인을 거절하는 일은 없다.


81년은 한국의 대미 수출이 물꼬를 틀 무렵이다. 저가 물건을 파는 백화점이나 잡화상에 가면 한국 물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의류, 신발류는 거의 한국산이 독점을 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가끔 후리웨이 (freeway)에서 현대 ‘포니’ 자동차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미국에 이민 온 한국사람들에게 한국산은 별 인기가 없었다. 석회 두부, 수은 콩나물, 공업용 식용유 등으로 한국 물건에 대한 신뢰도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일제나 미제를 선호하고 있었다. 어느 집에 가나 가전제품은 모두 일제나 미제를 썼고, 식재료도 일제를 사서 먹었다.


미국에 와서 처음 ‘이찌방’ 라면을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한국에서 먹던 라면에서 나던 방부제 냄새가 없었다. ‘보탄’ 쌀로 지은 밥은 한국에서 먹던 경기미보다 훨씬 찰지고 맛있었다. 어묵도 일제가 모양도 좋고 맛도 좋았다.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90년대로 접어들며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한국의 가전제품들이 속속 매장에 등장했고, 다양한 맛의 라면이 수입되었으며, 질 좋은 한국 상표의 쌀들이 등장했다. 지금은 전자제품 매장 어디를 가나 ‘삼성’과 ‘LG’ 가 가장 몫이 좋은 장소에 자리하고 있으며, TV, 세탁기, 냉장고 등은 비싼 가격에도 잘 팔리고 있다. 나도 처음에는 스테레오나 가전제품 등을 일제로 장만했으나 언젠가부터는 삼성이나 LG 만 구입하고 있다.


요즘 일제 라면을 먹는 한국인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제 라면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동안 한국 라면은 급속히 질과 맛을 개선하여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제는 대부분의 마켙이나 식품점에서는 한국 라면과 김, 김치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미국에 와서 맨 먼저 한 일은 이사 갈 집을 찾고 새로운 사업체를 찾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가게와 집을 모두 팔았고, 곧 집을 비워주어야 했다. 신문을 보고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밴나이스’에 있는 집을 찾아 동생과 함께 가서 보고 월세 계약을 했다. 미국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전세가 없다. 모두 월세다.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가게를 샀다. 주유소와 붙은 조그마한 편의점이었다. 음료수와 스낵, 담배와 맥주, 그리고 약간의 생필품을 파는 한국의 구멍가게 정도의 가게였다. 원래는 주유소와 같이 하는 가게인데, 주인이 편의점만 떼어 판 것이다. 권리금을 주고 임대를 한 것이다. 가게 안에 주유소의 전기 스위치들이 있어 일 년 365일 하루도 문을 닫을 수 없었다. 매일 아침 6시에 문을 열어 밤 10시에 문을 닫았다. 그 가게를 하는 동안 명절이나 생일에도 가족이 모두 모여 함께 밥을 먹은 적이 없다. 누군가는 가게를 지키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그 가게를 하며 부모님은 동생들을 모두 대학에 보냈고, 결혼을 시켰다. 아버지는 10년 후에 다만 얼마라도 권리금을 받고 그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려고 했으나, 유대인 주인의 약은 수에 맨손으로 가게를 그만두고 말았다.


10년 계약이 끝나자 임대 연장을 안 해 준 것이다. 유대인 주인은 주유소를 헐고 그 자리에 상가를 지으며 아버지에게 다시 권리금을 내고 새로 계약을 하자고 했다. 아버지는 퇴직금 없이 명퇴를 당한 셈이다. 그 일로 은퇴를 하시고, 미국 정부에서 지급하는 국민연금을 받으며 노년을 보내셨다.


가게 운영은 부모님이 하셨지만 물건을 주문하는 일, 관공서에서 오는 공문, 그리고 가끔씩 발생하는 이런저런 문제는 내가 도와 드려야 했다. 가게를 살 때부터 계약서에 나도 사인을 했었다. 가게를 인수하며 전에 가게를 운영하던 나이 든 백인 매니저 부부에게서 트레이닝을 받았다. 내 이름을 잘 발음하지 못해 영어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더니 ‘데이비드’ (David)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2년 후 공무원이 될 때까지 나는 ‘데이비드’라는 영어 이름을 썼다.


가게를 인수한 몇 달 후, 나는 아파트를 얻어 집을 나왔다. 나가서 살겠다고 하자 아버지가 얼마간의 돈을 주어 중고 냉장고와 TV를 장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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