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에는 스테이션 웨건이 유행을 했다. 앞 좌석이 벤치 스타일로 되어 있어 세명이 탈 수 있다. 뒷 자석의 등받이를 앞으로 접으면 긴 공간이 생겨 큰 짐도 실을 수 있었고, 대형 스테이션 웨건에는 뒤에 좌석이 한 줄 더 있어 8명까지도 탈 수 있었다. 그 후 ‘사커 맘’ (soccer mom)의 상징인 미니밴이 등장하며 스테이션 웨건의 시대는 갔고, 요즘은 크로스오버 스타일의 ‘SUV’ (sports utility vehicle) 가 대세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하여 매일 한인신문의 구직난을 살펴보고 있었다. 어느 날 타운의 여행사에서 여행책자를 번역하기 위하여 번역사를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게 되었다. 일감을 받아다가 한 2주 정도 번역을 했는데, 이제 그만하라는 연락이 왔다. 번역한 원고를 가져다주며 상황을 보니 함께 일감을 받아갔던 다른 번역사들을 정식직원으로 채용하며 나만 제외한 것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미주 한인사회의 인식이 한국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한인사회에서 직장을 구할 생각을 아예 접어 버렸다.
인생을 살다 보면 삶에 큰 영향을 주게 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내게도 몇 번 그런 기회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Abilities Expo’라는 장애인 박람회에 갔던 일이다. 어느 날 가게에서 LA Times 신문을 보니, 'Abilities Expo’ 가 LA에서 열린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가서 보니 장애인을 위한 수많은 휠체어, 보장구, 자동차와 각종 서비스 그리고 장애인을 채용하는 회사들이 부스를 차려 놓고 있었다. 그곳에서 손으로 자동차를 운전을 할 수 있는 장치를 보았다. 이건 내가 안경을 처음 써보고 경험했던 새로운 세상만큼이나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TV를 보면 화면이 흐릿하게 보였는데, 아주 천천히 눈이 나빠졌기 때문에 그것이 내 눈 탓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학교에 다니던 동생이 칠판 글씨가 안 보인다고 해서 안경을 맞추었다. 어느 날 축구 중계를 보다가 동생의 안경을 끼어 보았는데 완전히 다른 모습의 화면이 나타났다. 공을 드리블하며 달리는 축구 선수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나도 안경을 맞추게 되었다.
장애인 박람회에 다녀온 후, 전화번호부를 보고 관공서와 대기업 50여 군데로 취업을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고등학교 졸업 자격증과 한국에서 영어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던 일이 전부였다. 대부분 답장을 해 주었지만, 일자리를 주겠다는 답장은 한 통도 없었다.
그중 주 정부 재활국 (Department of Rehabilitation)에서 보내온 편지가 있었다. 도와줄 테니 연락을 하라는 것이었다. 재활국은 연방정부의 예산으로 장애인의 직업재활을 도와주는 부서였다. 먼저 장애판정을 받기 위해 의사에게 보내 주었다. 혹시라도 의술이 발달한 미국이니 나의 장애를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의사가 해 줄 수 있는 일을 아무것도 없었다.
80년대 캘리포니아 주는 방위산업체가 호황을 누리던 시절이다. ‘보잉,’ ‘록히드’ 등에 미사일과 항공기 제작에 필요한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었다. 2-3개월 단기 훈련을 마치면 손쉽게 이런 업체에 전자 조립공으로 취업이 가능했다. 한인을 비롯 많은 이민자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
나를 만난 재활국 카운슬러는 내게도 전자 조립공 자리를 제안했다. 직업학교에 보내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무직을 고집했다. 몇 차례 만나며 그와 다투기까지 했다. 내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그는 내게 필기시험을 치러 합격점을 받으면 사무직 취업을 알선해 주기로 했다. 시험을 보아 합격점을 받았다.
그가 전해주는 취업 정보를 보고 연락을 하며 찾은 곳이 ‘To Be Sold By Owner’라는 부동산 사무실이었다.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로 다양한 부동산 브로커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지만 그 당시로는 새로운 개념의 부동산 회사였다. 부동산을 팔 때는 매물로 내놓는 것을 도와주는 브로커가 3%, 팔아주는 브로커가 3%, 합계 판매가의 6% 가 브로커 비용으로 나간다. ‘To Be Sold By Owner’는 브로커 비용의 일부를 환불해주는 새로운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사장은 60대 초반이었고, 부사장인 그의 아내는 30대 초반이었다. 재혼 부부였는데, 사장에게는 아내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이 있었고, 둘 사이에는 엄마를 꼭 닮은 쌍둥이 딸이 있었다.
그 무렵 최저시급이 $3.50이었는데, 나는 $5.00을 받았다. 그곳에서 나는 각종 서류를 작성하는 일, 파일을 정리하는 일, 전화받는 일 등을 하며 미국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