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2년 동안 일하며 여러 명의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에서 미군으로 근무했던 ‘로저’라는 흑인은 인삼차를 좋아했다. 내가 가끔 분말로 된 인삼차를 주면, 아껴 두었다가 몸살 기운이 있을 때 마신다고 했다.
60이 넘었던 ‘찰리’는 대학에 다니는 20대 여학생과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녀가 대학을 마치면 자기를 떠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숙식과 학비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머무는 것이라고 했다.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 이민자 ‘레이’는 고국에서는 이혼을 할 수 없어 필리핀의 본처를 피해 미국으로 도망을 와서 백인 여성과 살고 있었다. 백인 남성인 '톰'은 집을 팔 생각은 않고 64K 애플 컴퓨터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나이가 많았던 또 다른 백인 부동산 중개인은 힘들게 살았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예전에는 저소득층에게 나라에서 음식물을 나누어 주었는데, 고기가 든 통조림은 어른들이 장에 내다가 술이나 담배와 바꾸고 자기와 동생은 콩을 먹었다고 한다. 오래되어 곰빵이가 핀 빵은 토스트를 해서 겉을 끍어내고 먹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때마침 불어닥친 부동산 불경기 탓에 이들은 수입이 시원치 않았다. 회사에서는 앞으로 받게 될 부동산 소개비를 담보로 매달 일정액의 봉급을 주었는데, 몇 달 계속해서 소개비를 벌지 못하면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이 회사에 취업을 하며 나는 2년제 대학인 Los Angeles Valley College 에 입학을 했다. 캘리포니아 주에 1년 이상 거주한 주민에게는 학비를 면제해 주었는데, 온 지 얼마 안 된 탓에 나는 등록금을 내고 다녀야 했다. 다행히 학교에서 학비를 지원해 주었고, 재활국에서 교통비와 교재비를 제공받았다.
81년 겨울 재활국에서 주선해 주어 자동차 운전교육을 받게 되었다. 82년 봄에 운전면허를 받고 자동차를 개조하여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동차 지붕에는 휠체어를 싣는 장치를 달아 혼자서 출, 퇴근이 가능해졌다. 처음 혼자서 차를 몰고 출근하던 날,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는다. 갑자기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손으로 눌렀지만) 차가 빙글 도는 것이 아닌가. 죽는구나 싶었는데, 차는 길 한가운데 서고 다행히 오가는 차가 없었다. 마침 토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미국 회사들은 대부분 5일 근무라 토요일 오전은 교통량이 적다.
내가 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의미다. 운전대 뒤에 앉은 나는 어느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릴 수 있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내 몸과 달리 자동차는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준다. 나의 '아바타'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리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내가 공무원으로 일하던 주 산재기금 (State Compensation Insurance Fund) 은 본사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었고, 도처에 지역 사무소가 있었다. 나는 7-8시간 거리에 있는 샌프란시스코나 새크라멘토 까지도 단숨에 운전을 하고 다녔다.
오후 5시까지 일을 하고 학교로 갔다. 어머니의 4촌 동생이 미국에 다녀갔다. 그 이모와 저녁을 먹었는데, 어머니에게서 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모가 칭찬의 말이라고 한 것이 내게는 서운하게 들렸다. “밤에는 야간대학에 다닌다며? 열심히 사는구나.”
미국에는 야간대학이라는 것이 없다. 직장에 다니며 학업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많아 모든 대학에서는 전일제 수업을 한다. 이모가 모르고 한 말이긴 하지만 야간대학에 다닌다고 업신여기는 소리로 들렸다. 말은 함부로 할 것이 아니다. 무심코 내뱉는 말이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상대방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나는 한 달에 두 번 봉급을 받았는데, 2년째 되던 해부터는 봉급날이 되어도 수표가 지급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하루 이틀 밀리더니 어떤 때는 며칠씩 밀리기도 했다. 교우 중에 도로국 공무원이 있었는데, 그는 내게 공무원직이 안정적이며 좋다고 권유해 주었다. 공무원 시험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공무원이 되려면 필기시험과 구두시험을 보아야 했다. 시험에 합격을 한 후에는 불러 줄 때까지 긴 기다림을 참고 견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