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사무실에서 일을 하며 미국인들의 정서를 엿볼 수 있었다. 부사장인 ‘셰어’는 대학에서 만난 남자와 잠시 결혼생활을 하다가 헤어진 이혼녀였다. 헤어진 남편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여 잘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부부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사무실에도 놀러 오고 주말에는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 회사를 그만둔 후에 그녀는 나이 많은 사장과 이혼을 하고 재혼을 했던 모양이다. 어느 날 내게 ‘베이비 샤워’ 초대장이 날아왔다. 그녀가 재혼을 해서 아기를 낳게 된 것이다. 베이비 샤워를 하는 장소가 첫 번째 남편의 집이었다.
한국에서는 이혼을 하면 당사자는 물론 양가 친척들까지 원수처럼 지냈다. 이혼 후에도 친구처럼 지내는 미국인들의 정서가 아직은 내게는 낯설었다.
냉전시대가 종식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군비에 많은 예산을 투자하고 있었다. 학교 이곳저곳에 모병 안내서와 책자가 비치되어 있었다. 어려서 나의 꿈은 팔각모에 빨간 명찰을 단 해병대 헌병장교가 되는 것이었다. 미국 군대라면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해병대 모병 지원 카드를 작성해서 보냈다. 어느 날 저녁 아파트로 해병대 군복을 입은 모병관 두 명이 찾아왔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헛걸음을 한 것을 알고 잠시 어이없어했으나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시민권을 딴 후 연방 공무원으로 군속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해주고 돌아갔다.
주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했지만 마침 예산 문제로 신규채용이 동결되어 있어 불러 주는 곳이 없었다. 합격자 명단은 6개월 또는 1년의 유효기간이 있어, 그 기간이 지나면 다시 시험을 보아야 한다. 1년쯤 기다린 후 몇 군데서 채용면접 통지가 오기 시작했다.
재활국의 카운슬러는 내게 채용이 되고 난 후에 부동산 사무실에 사표를 내라고 권유를 했지만 나는 미리 알려주어 사람을 구하게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 면접을 보고 온 다음날 나는 부사장에게 공무원 자리를 알아보고 있으며 채용이 되면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라고 말해 주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니 사장 부부가 다녀갔다며 봉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고 통지였다. 다음날 출근해서 책상을 비우라는 내용이었다. 실직을 한 것이다. 다음날 사무실에 나가 내 책상을 비우고 마지막 봉급을 받았다. 섭섭해하는 부사장의 얼굴을 보니 나를 자른 것은 나이 든 사장의 결정이었던 것 같았다.
면접을 보았던 곳에서는 며칠 더 기다려야 한다는 연락이 왔다. 실업수당을 신청했으나 처음 7일은 대기기간이라 돈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며칠 후 주 산재기금에서 면접을 보라는 통지가 왔다.
막상 면접을 가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키 높이의 선반에 파일을 정리해야 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 장애인 보호법이 (ADA) 시행되기 전의 일이다. 1990년에 시행된 이 법에 따르면 업무의 중심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으면 다른 일을 일부 할 수 없더라도 장애인에게 동등한 취업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며칠 후 같은 사무실 다른 부서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를 면접한 오피스 매니저와 수퍼바이저는 공무원이라기보다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줌마 같은 백인 여성들이었다. 그녀들은 나를 채용한 된 후에도 늘 따스하게 잘 대해 주었다.
초봉 월 $1,050의 공무원이 되었다. 처음 들어간 직급은 말단 사무직 타이피스트 (office assistant – typing)였다. 사무실에는 30-40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새로 직원을 채용하면 지역사무소장이 면담을 했다. 지역 사무소장은 40대의 백인 남성이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당신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 의자에 앉는 것입니다 라고 답을 했다. 긴 생각 없이 문득 떠오른 생각을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나는 20여 년 후에 그 꿈에 상당히 접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