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달걀 사세요

by 고동운 Don Ko

지역 사무소장인 '빌' 은 매우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작은 농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달에 한두 번씩 자신의 농장에서 나온 달걀을 가져다가 직원들에게 팔았다. 그의 달걀이 도착하면 '다알리'라는 여직원이 딸랑딸랑 종을 쳤다. 직원들을 부추겨 돈을 모아 즉석 복권을 수백 장 사다가 회의실에 앉아 함께 끍기도 했고, 사무실의 낡은 가구나 헌 사무용품을 직원들에게 싸게 팔기도 했다. 30여 년 전이니 가능했던 일들이다.


휴게실 벽에는 직원들을 위한 게시판이 있으며 여기에 각종 공무원 시험 공고를 붙여 놓았다. 몇 년 동안 주 예산의 부족으로 동결해 놓았던 신규채용이 풀리며 이런저런 시험이 많이 있었다.


몇 달 후에는 컴퓨터에 자료를 입력하는 ‘key data operator’ 로 승진을 했다. 산재기금에서 전문직인 ‘representative’ 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을 졸업해야 한다. 대학을 마치지 못했거나 2년제 대학을 나온 직원들을 위하여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직급이 ‘technician’이다. 아직 대학을 다니고 있던 나는 ‘technician’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얼마 후 수습 보험 조정관 (worker’s compensation insurance technician) 자리가 비자 지원을 해서 승진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며칠 후 매니저가 부르더니 나의 승진이 취소가 되고 벤추라 사무소의 다른 직원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우선권이 있는데 인사과의 착오로 누락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구두로 한 약속도 약속이니 만큼 지켜져야 한다며 항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승진시험에는 각 부서에만 국한된 시험과 주 정부 모든 부서에 해당되는 시험이 있다. 나는 닥치는 대로 내가 지원할 수 있는 모든 시험에 응시를 했다. ‘Office technician’ 시험에 합격을 했더니, 공항 근처에 있는 주택 개발국 (Housing Authority)에서 연락이 왔다. 집에서 조금 멀기는 했지만 승진의 기회였고 마침 지난번 승진 사건으로 화가 나있던 터라 주저하지 않고 갔다. 나는 그것으로 주 산재기금과의 인연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었다. 운명이란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주택 개발국으로 승진을 해서 갔으니 내 이름은 ‘office technician’ 명단에서 빠지는 것이 당연한데, 누군가의 실수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2달쯤 후, 산재기금의 LA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통근거리도 짧고 사무실 분위기도 좋아 보였다. 그 자리에서 채용이 되었다. 50년대 지은 2층 건물인데, 장애인 화장실이 없었다. 아래층에 있는 화장실을 고쳐 주기로 했다.


2주 후 출근을 하니, 그날 아침에 화장실을 고치고 있었다. 수퍼바이저는 오늘은 집에 가고 다음날 출근을 하라고 했지만 이왕에 나온 것, 버틸 때까지 버틴다는 심정으로 일을 시작했다. 오전에 두 차례 일회용 컵을 가지고 2층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고 나니 오후에 장애인 화장실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 빌딩에는 남녀 공용 장애인 화장실이 마련되었다.


이 무렵 벌써 LA 다운타운에는 홈리스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사무실 건너편에는 공원이 있었는데, 늘 홈리스들이 있었고 낮에도 마약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빌딩 입구 앞에 마련된 장애인 주차칸을 이용했으나 일반직원들은 길 건너 직원 주차장을 이용해야 했다. 출, 퇴근 시간에는 총을 찬 무장경비원이 근처를 서성이며 경비를 섰다.


그 사무실에서 처음으로 마그네틱 카드를 넣는 타자기를 보았다. 타자 친 내용을 마그네틱 카드에 저장해 놓을 수 있어, 메모 등을 편집하면 그 부분만 고쳐서 다시 프린트할 수 있었다. 워드프로세서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는 비서들의 날 (secretary’s day)과 상사의 날 (boss’s day) 이 있다는 것도 그곳에서 알았다. 하루는 매니저가 나와 또 다른 여직원을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비싼 점심을 사 주었다. 비서들의 날에는 매니저가 사무직원들에게 선물과 밥을 사주고, 상사의 날에는 부하직원들이 돈을 모아 매니저와 수퍼바이저에게 선물을 한다. 비서들의 날은 이제는 직원의 날 (Administrative Professionals Day)이라고 부르며 4월 마지막 주 수요일이며, 상사의 날은 10월 16일이다. 공직사회와 회사들은 4월 마지막 주에 하루를 직원 감사의 날로 (employee appreciation day) 정해 회식이나 야유회 등을 한다.


LA에서 2년쯤 지내고 나니, 우드랜드 힐스의 지역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수습 보험 조종관 자리가 났으니 오겠냐는 전화였다. 면접도 없이 전화로 채용이 되어 다시 가게 되었다. 그 지역사무소와의 뗄 수 없는 악연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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