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어색하게 화해를 했다

by 고동운 Don Ko

캘리포니아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는 (“It never rains in Southern California”) 알버트 하몬드의 팝송처럼 캘리포니아에는 겨울에만 잠시 비가 내린다.


비가 와도 휠체어를 밀고 가려면 우산을 받을 수 없다. 판초 비옷을 써보기 했는데, 번거롭고 불편하다. 학교에 가면 주차장에서 교실까지 얼마간의 거리가 있다. 비가 오는 날은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서둘러 간다. 건물에 도착하면 화장실에 가서 페이퍼 타올로 대충 빗물을 닦아내고 수업에 들어갔다.


같은 과목이라도 낮 수업은 한 주에 2-3번 만나지만 야간수업은 한 번만 만난다. 3학점짜리 과목이면 3시간 수업을 한다. 졸며 수업을 듣는 날도 많았다. 한 학기에 2-3과목씩 파트타임으로 4년을 다녔는데, 좋은 학점은 얻지 못했다. A 학점보다는 B학점이 많았고, 가끔은 C를 받기도 했다.


비슷한 또래가 다니는 한국의 대학과 달리 미국의 대학, 특히 2년제 대학에는 다양한 연령과 배경의 사람들이 다니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는 일이 쉽지 않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단 한 명의 친구도 만들지 못했다. 나는 파트타임으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2년제 대학을 4년 만에 졸업했다.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며 가운을 입고 사진을 찍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LAVC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인 ‘CSUN’에 3학년으로 편입을 했다. 2년 동안 ‘랭캐스터’로 이사를 가서 사는 바람에 잠시 휴학을 했고, 다시 재입학을 했지만 결국 4학년에 학업을 그만두었다. 사는 일이 힘들어지기도 했고, 동기부여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문직 공무원이 되려면 대학 졸업을 해야 하지만 일을 해서 경력을 쌓으면 학력을 대신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필요한 경력을 쌓아 산재기금에서 잘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대학 졸업장이 필요치 않았다.


장애인의 사회참여가 보장된 미국이지만 직장을 갖고 일을 하는 장애인은 생각보다 적다. 2017년 통계에 따르면 정상인의 65.7% 가 일을 하고 있는데 반해 장애인은 18.7% 만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장애인 보호법이 시행되기 이전인 80년대에는 이보다 더 적었을 것이다. 사고로 중도 장애를 입은 경우에는 더 많은 보상을 받기 위해 일을 하지 않으며, 선천적 장애인은 어려서부터 정부가 지급하는 장애인 연금과 저소득층에게 주어지는 복지혜택에 익숙해져 일을 하지 않는다.


장애인을 가까이해 본 적이 없다는 동료 여직원이 내게 샤워는 어떻게 하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욕조 바닥에 앉아서 한다고 말해 주었다.


거래처의 초대로 호텔의 양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난생처음 코스로 나오는 양식을 먹게 된 것이다. 할머니가 박사장의 초대로 미군 식당에서 했다던 식으로 나도 옆사람을 보고 따라서 먹었다. 샐러드는 바깥쪽의 포크와 나이프로 먹고, 메인은 안쪽 것으로 먹고… 빵 접시는 왼쪽 것을 쓰고, 물은 오른쪽 잔으로 마시고…8-10명이 앉은 둥근 테이블에서 한 사람이 남의 자리의 음료수 잔을 집어 들면 모든 사람이 틀리게 된다. 회식의 횟수가 늘어나며 격식 없이 대충 먹는 미국인들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습 보험 조정관으로 1년을 마치고 나자 회사에서는 내게 새로운 직책을 주었다. 의료비 절감을 위하여 과다 청구된 것을 조정하고 삭감하는 일이었다. 산재기금으로서는 처음 시작하는 일이었는데, 내가 선발된 것이다. 그 일을 1년쯤 했을 무렵, 전문 직급인 ‘worker’s compensation insurance representative’ 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졌다. 시험에 합격하여 승진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매니저인 '다나'가 나를 부르더니 당분간 승진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내가 처리한 의료비 청구건으로 불평이 많다는 것이었다.


늘 청구하는 대로 지불하던 것을 갑자기 줄여서 지불하니 불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내가 다른 자리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새로 사람을 뽑아 교육을 시켜 실무에 투입하려면 몇 달의 기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나를 잡아두어야 했던 것이다.


몇 주 후 LA 지역사무소의 보험 조정관으로 승진을 하여 우드랜드 힐스를 떠나게 되었다. 직원이 승진을 하여 사무소를 떠나게 되면 송별회를 해 주며, 이때 수퍼바이저와 매니저도 참석을 하는 것이 관례이다. '다나’는 나의 송별회에 오지 않았다. 5-6년 후, 내가 ‘올해의 수퍼바이저’로 뽑혀 컨퍼런스에 참석했을 때, 그녀가 내게 와서 축하의 말을 건네는 것으로 우리는 어색한 화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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