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는 한국인들의 미주 이민이 활발하던 시절이다. 공항에 나가 보면 이민 가방을 밀고 나오는 한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미 사회의 특성은 한국에서의 지위나 경험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높은 자리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살던 사람들일수록 적응하기가 힘들다. 몸을 쓰며 힘들게 살던 사람들이 쉽게 자리를 잡았다.
한국 정부가 달러의 유출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마음대로 가지고 올 수 없었다. 사람들은 잔디를 깎고, 청소를 하고, 중고 깡통 밴을 사서 물건을 싣고 이곳저곳 스왑밋 (swap meet)을 찾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남자보다는 여자가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빨리 적응해 나갔다. 얼마간의 돈이 있는 사람들은 흑인지역에 들어가 가발이나 옷장사를 했고, 리커스토어를 하기도 했다. 가끔은 강도의 총에 희생되는 이들도 생겨났다.
일찍 와서 먼저 자리를 잡은 이민 선배(?)들은 나중 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민 적응기를 무용담처럼 부풀려 들려주곤 했다. 교우들 중에는 일찍 이민 와서 자동차 정비를 일을 하던 P, 시험 스트레스로 탈모를 겪으면서도 간호사가 된 아내를 둔 K, 유학생으로 왔다가 비지니스로 성공하여 주유소를 하고 있던 L 씨 등이 있었다. (모두들 나 보다 15-20년 연상이었다.) 나와 비슷한 무렵에 이민을 온 C 씨는 반평생 고등학교 교사를 했던 사람이다. 그의 아내와 딸은 직업훈련을 받고 전자 조립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그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얼마 후 그는 미국 교회의 관리인으로 취직을 했다.
그중 L 은 가장 먼저 노스릿지에 풀장이 있는 커다란 2층 집을 장만했다. 그는 휴일과 주말이면 교우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풀파티를 하고 갈비를 구워 주었다. L은 당일에 사진을 뽑아주는 사진현상소와 함께 사설 우편사서함 비지니스를 열었고, 얼마 후에는 우체국 대행업까지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가 편의점을 하며 힘들게 모은 3만 불의 돈을 그에게 맡기고 이자를 받았다.
얼마 후 그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남의 돈으로 시작한 장사가 시원치 않아 집이며 비지니스가 모두 넘어가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그에게 돈을 빌려주고 있었다. 나처럼 몇 푼 이자를 받기 위해 자진해서 그에게 돈을 맡긴 이들도 있었다. 그에게 돈을 빌려 주었던 10여 명의 교우가 그를 불러 수습대책을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며칠 후 그가 나를 찾아왔다. 빌린 돈 대신에 사진형상소와 우편사서함 비지니스를 내게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나를 특별히 생각해 주는 양 생색을 냈다.
알고 보니 껍데기만 남은 상황이었다. 우편환으로 빚을 막다가 감사에 걸려 우체국 대행업은 이미 취소가 되었고, 남어지 비지니스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비지니스를 인수했다. 그것조차도 그의 술책이었다. 야반도주를 하기 위하여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며칠 후 그는 가족과 함께 잠적했다.
나는 인수받은 직원을 데리고 몇 달간 영업을 이어갔다. 퇴근을 하면 가게에 가서 물건을 주문하고 장부를 정리했다. 비용을 빼고 나면 가게의 월세와 사진 인화기의 임대료가 부족했다. 결국 몇 달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L은 가족과 함께 ‘괌’에 가서 살고 있었다. 세상은 좁아 아버지의 후배가 어찌어찌해서 그의 거주지를 찾았다. 부모님이 괌으로 그를 찾아갔다. 다만 얼마씩이라고 매달 돈을 보내드리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두 달 만에 그는 소식을 끊었다. 후에 전해 들으니 그는 몇 년 후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와 경쟁하듯 집을 넓혀갔던 K와 P는 그 후 찾아온 부동산발 불경기에 모두 집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