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아버지의 북한 방문

by 고동운 Don Ko

80년대 말, 아버지는 북한에 다녀왔다. 먼저 삼촌이 다녀와 형제들의 소식을 전하자 아버지도 용기를 내어 나선 것이다.


그 무렵 미주에는 친북 단체들이 생겨나 재미동포들의 북한 방문을 주선하고 있었다. 초기에 북한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크게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 70년대 한국에서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을 고국으로 초대했던 것과 비슷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에게 한국의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고국을 찾는 동포의 일가친척 집에는 새로 페인트를 칠하고, 냉장고, TV 등을 새로 넣어 주고 환대를 베풀었다.


고향을 찾은 아버지는 40년 만에 형제들을 만났다. 당에서는 형제들 중 몇 사람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상봉이 이루어졌으나, 남어지 형제들을 고향에서 보고 싶다고 하자, 고향까지 안내를 해 주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에는 서둘러 만든 비석이 서 있었다고 한다.


당에서 마련한 축하연이 무르익을 무렵 술에 취한 막내 삼촌이 아버지를 발로 차며 “개새끼”라고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국군 장교였던 아버지가 북진 길에 고향에 들러 김일성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는 바람에 온 가족이 반동분자로 분류되어 고향에서 쫓겨났었다. 탄광촌에서 반평생을 보내며 얼마나 형을 원망했을 것인가. 가족 중 아무도 당원이 될 수도 없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밥을 먹는 자리에 막내 삼촌이 풀 죽은 모습으로 나타나 아버지에게 절을 하며 사과를 했다고 한다. 아마도 당국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90년대 초에 한 번 더 고향에 다녀왔다. 아버지와 삼촌이 다녀온 후, 4촌들 중에 당원이 된 사람들도 생겨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북한 땅에 남은 동생들에 대한 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로토 복권에 집착하며 매주 복권을 사셨는데, 당첨이 되면 고향에 국수공장을 세워 일가친척들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꿈을 가지고 계셨었다.


나도 수년 동안 직장에서 단체로 복권을 샀다. '암빠로' 라는 필리핀 직원이 로토그룹을 이끌고 있었다. 20여 명이 참여해서 매주 2달러씩 회비를 내어 복권을 샀다. 10여 년 만에 여섯 숫자 중 다섯 개가 맞았는데, 상금은 고작 2천여 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내 몫으로 백여 달러를 받았다. 그 후 그녀가 은퇴를 하며 로토그룹은 끝이 났다.


미국에 이민 온 동포들 중에는 이북 출신 실향민들이 많다. 어차피 남한도 고향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인지 쉽게 한국을 떠나 온 것 같다. 그들 중 북한에 일가친척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상당수가 북한에 다녀왔다.


실향민 1세대는 매년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우리 집만 해도 아버지, 고모부, 아버지의 4촌과 5촌 등이 모두 돌아가셨다. 내게는 얼굴은커녕 이름도 모르는 4촌들에 대한 그리움 따위는 없다. 굳이 고향을 찾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한반도에 평화가 오고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론적 이야기에는 동의하지만, 통일 이후에 부담해야 하는 비용에 선뜻 주머니를 털 수 있는 사람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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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er color by Grace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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