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17년 만의 고국 방문

by 고동운 Don Ko

직장에서 승진을 하여 월급도 오르고 IEA 학원에서 강의도 하며 다소 생활의 여유가 생기자 고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청와대로 편지를 썼다. 나를 소개하며 한국의 장애인들에게 도움이 될만할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내가 장애인으로 미국에서 살며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전달하는 것이 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마 후 장애인 재활정보센터의 나운환 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청와대가 내 편지를 나소장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의 소개로 '장애인 신문'과 연결이 되었다.


그 후 3년 정도 장애인 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다. 장애인 신문을 우편으로 받아 보며 지난 10여 년 사이에 한국에서는 장애인의 권익과 복지에 발전이 있었으며 관련 단체들도 많이 생겨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문에 장애인 고용촉진공단의 논픽션 공모전 소식이 실렸다. 무학력의 장애인이 미국에서 공무원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보냈는데, 덜컥 당선이 되었다. 해외 거주자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을 것인가를 놓고 잠시 의견이 분분했었는데, 심사위원장이던 '솟대문학' 발행인이자 방송작가인 방귀희 교수가 내 글을 밀어 당선작이 되었다고 한다.


시상식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17년 만에 처음 나가는 고국 방문인데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나운환 소장의 소개로 삼육재활원에 2주 동안 머물게 되었다. 그곳에 머물며 교직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고, 학교에서 주선한 강연회, 그리고 기숙사 학생들과의 저녁 만남 등도 가질 수 있었다.


서울시에 자리하고 있던 대부분의 장애인 시설들은 땅 값이 오르자 시설을 팔고 시 외곽지대에 훨씬 큰 규모의 건물을 짓고 이전을 했다. 수용인원이 늘어났으니 당연히 정부에서 받는 보조금도 늘어났을 것이다. 내가 머물었던 삼육재활원에는 장애인 학생을 위한 학교, 기숙사, 그리고 사고 등으로 장애를 입은 중도장애인들을 위한 재활시설 등이 있었다.


자동차 사고나 산재 등으로 장애를 입은 장애인들은 휠체어나 보장구 등도 외제를 쓰고 있었고, 저녁이면 자기들끼리 모여 고기를 구워 술을 마시기도 했다. 나는 외출을 하지 않는 날은 기숙사의 학생들과 함께 밥을 먹었는데, 통학을 하는 학생과 교직원 등도 모두 함께 먹는 점심과 달리 아침과 저녁이 부실해 보였다. 알고 보니 점심은 학교 급식 수준으로 나오고, 아침과 저녁은 장애인 시설 수준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기숙사 학생들 중에는 방학을 해도 집에 안 가려는 사람들도 있고, 졸업을 해도 사회적응이 되지 않아 비슷한 시설을 전전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학교는 학습능력과 상관없이 단지 장애인이라는 공통점으로 한 학급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학생들 중에는 이 때문에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장애인만 다니는 학교를 나와서는 경쟁력이 떨어져 일반 대학에 진학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려서부터 함께 놀고 공부하며 자라야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장애인도 사회 적응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놓곤 했다.


재활원에는 기숙사 학생들을 관리하는 관리교사들이 따로 있었다. 기숙사는 남자동과 여자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사춘기 아이들이 모인 곳이라 별도의 관리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나는 남자동의 숙직실에 머물렀다. 여교사 중 한 사람이 내게 호감을 보였다. 저녁 시간이면 숙직실로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내가 외출에서 돌아오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시간에 나왔던 구운 고구마나 찐 옥수수 등을 남겨 두었다가 주기도 했다. 사연이 있는 여인 같았다. 잠시 동남아에서 외국 생활을 한 적도 있고, 아이도 있는데 함께 살지는 않았다.


귀국을 이틀인가 남긴 밤이었다. 그날도 귀가가 늦었다. 역시나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오랫동안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간 그녀를 안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버렸다. 곧 돌아갈 사람이고, 손님으로 머무는 시설에서 불미스러운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의 생각을 전하고 그녀를 타일러 보냈다. 내가 귀국하던 날, 모두들 나와서 나를 배웅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온 후 신문에 난 유학상담 안내 광고를 오려 그녀에게 보내 주었다. 그녀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Still Life 숙제.bmp

(water color by Grace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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