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IMF 이전이었다. 사람들은 여유가 있어 보였고, 곧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차 있었다. 정부의 예산을 지원받아 장애인 단체도 많이 늘었고, 장애인 권익과 복지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고는 있었지만 장애인 복지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어디를 가도 장애인 편의시설이 부족하여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의 등에 업혀야 했다. 교육을 받고 자격을 갖춘 장애인이 많이 부족해 보였다. 부모의 등에 업혀 학업을 마쳤던 장애인들이 관련 단체를 이끌고 있었다.
내가 미국에서 산업재해 보험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안 장애인 신문사의 편집장 김동범 국장의 소개로 근로복지공단과 연결이 되어 공단 직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그때 맺은 인연으로 그 후 공단 세미나, 연구 책자 발간 등에 참여했으며 지금도 가끔씩 원고 청탁을 받곤 한다.
근로복지공단과 일을 하다 보니 실무자가 2-3년마다 바뀌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의 공직사회는 정기적으로 인사이동을 하여 자리를 바꾼다고 들었다. 직원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일을 배울 수 있고, 부서로서는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전문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단점도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일반 공무원들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 다른 부서나 지역으로 전출되는 일이 없다. 수십 년 동안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된다는 장점이 있다.
방송작가로 활약하고 있던 방귀희 교수의 주선으로 불교방송과 TV에도 출연했다. 그 후, KBS 제2 라디오의 장애인 프로의 해외통신원으로 수년 동안 방송을 하기도 했다. 갑자기 한국의 장애인계에서 유명인사가 되어 버렸다. 더러는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나 소란을 피우나" 하는 눈길을 주는 이들도 있었다.
얼마 후 한국재활재단에서 책을 내자는 제의가 왔다. 장애인 인식개선을 위하여 매년 책을 제작하여 학교에 배부하고 독후감 공모전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중, 고등학교에 배부하려고 하니 영어와 한글로 책을 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나는 날개를 달았다'이다.
이 책의 편집제작을 고은경이 대표로 있던 '명작'에서 했다. 은경이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내가 초고를 보내고, 명작에서 몇 군데 고칠 것과 원고의 분량을 늘려 달라는 연락이 왔다. 편집한 원고를 보내와 내가 한번 더 검토를 하고, 삽화에 필요한 사진을 골라 보내니 책이 완성되었다.
먹이가 귀한 사막이나 심해의 동물들은 한번 먹이를 물면 놓지 않는다고 한다. 친구를 사귈 기회가 많지 않았던 나는 한번 맺은 인연을 쉽게 놓지 않는다. 은경이와의 인연도 그렇다. 책이 나오는 것으로 그녀와의 공식적인 일은 끝이 났었다. 그래도 가끔씩 메일을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고 지냈다.
2년쯤 지난 후, 이번에는 재외동포재단의 동포문학상 논픽션 부분 대상을 받게 되어 다시 고국을 찾게 되었다. 동포재단에서는 행사기간 3일만 강남의 '아미가' 호텔에 숙소를 제공했다. 행사 시작 이틀 전에 한국에 도착하여 자비로 호텔에 묵었다. 고급 호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방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장애를 극복하고 뉴욕시 판사가 되어 한국에도 잘 알려진 정범진 판사가 묵었다는 방을 쓰게 되었다. 화장실 입구에 임시로 나무 널빤지를 깔아 경사로를 만들어 사용했다. 화장실 입구에 한 계단 올라갔다 다시 내려가야 하는 턱이 있었다. 빌딩 입구에도 이런 식으로 기능상 아무 필요가 없는 턱들이 있었다. 설계하는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모양을 내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한국에 며칠 더 머물 예정이었는데 마침 장애인 시설에 방이 있다고 해서 호텔비를 절약하기 위해 행사가 끝난 다음날 숙소를 옮겼다. 가서 보니 외딴 방에 화장실 등의 시설이 매우 열악했다. 게다가 아래층 장애인 단체 사무실 직원들이 퇴근하고 나면 아무도 없이 혼자 남게 된다. 간담회를 하고 점심만 얻어먹은 후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한국의 장애인들은 지방에서 올라오면 그 방에서 편안히 묵었다 간다고 했다. 내가 너무 유난을 떤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한국의 장애인 복지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며칠 더 머무는 동안 은경이를 만났다. 나를 데리고 다닐 작정으로 체격이 좋은 후배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먼저 비원으로 갔다. 처음에는 완만한 경사로 별 어려움 없이 두 여자의 도움으로 잘 갔는데, 잠시 후 급경사가 나왔다. 마침 근처에 방위병 차림의 공익요원들이 있어 도움을 요청했더니 근무지 이탈을 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한다. 먼길도 아니고 20-30미터 거리를 근무지 이탈이라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침 지나가는 미국 젊은이들이 있어 내가 부탁을 하니 기꺼이 출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는 식당 종업원의 등에 업혀 들어갔고, 저녁을 먹기 전에는 식당의 화장실 앞에서 맥주병에 소변을 보아야 했다.
한국과 미국은 근본적으로 장애인 복지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한국에서는 장애인을 사회가 돌보아 주어야 하는 사람들로 인식하고 있다. 장애인 전용 화장실이나 엘리베이터를 만들고 장애인을 고용하는 기업에 장려금을 준다. 그러나 장애인 시설이 이웃에 들어오는 것은 시위를 하며 막는다.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장애인 전용 엘리베이터나 화장실이 따로 없다. 장애인 표시는 장애인도 사용이 가능하다는 표시일 뿐이다. 정부는 장애인이 주거, 교육, 취업 등에 있어 비장애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해 주고 있다.
내가 미국에 와서 가장 좋았던 일은 아무도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는 점이었다. 한국에서는 외출을 하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마치 그런 몸으로 왜 나왔느냐고 질책하는 것 같은 눈초리였다. 미국에서는 아무도 내게 이상한 시선을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