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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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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동운 Don Ko Feb 23. 2018

일기 쓰기

이 아침에...

나는 일기장에 대하여 다소 부정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크리스마스 선물이 일기장과 볼펜이었다. 한글을 배워 읽고 쓸 수 있을 무렵 부모님에게서 받은 선물이다. 그건 내게 선물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 후 나를 괴롭히는 과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기장 선물을 받고 얼마 후 아버지에게 검사를 받았는데 일기를 매일 쓰지 않았다고 야단을 맞았다. 그다음에는 매일 일기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또 야단을 맞았다. 매일 같은 내용을 썼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났다. 밥을 먹었다. 동생과 놀았다. 밤에 씻고 잤다.” 내가 단골로 적었던 일기의 내용이다. 가끔은 “동생과 싸워 야단을 맞고 울었다.” 또는 “오늘 집에 손님이 오셨다.” 정도의 변화를 주기도 했다. 그 후에도 2-3년 더 일기장을 선물로 받았지만 어떤 내용의 일기를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미국에 와서 우리들과 살게 된 조카아이들에게 영어공부의 한 방편으로 일기를 쓰게 했다. 첫 주에는 2줄, 그리고 매주 한 줄씩 늘려 5줄을 쓰게 했다. 아이들이 영어로 쓰는 일기의 내용이 내가 그 어려서 한글로 썼던 일기의 내용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날씨가 덥다. … 을 먹었다. 맛이 좋았다. 어디에 다녀왔다.” 등의 내용이 순서만 바꾸어 매일 반복되게 쓰여 있었다. 나중에는 한 문장에 단어를 5개 이상 사용하게 쓰게 하다가 이제 그만두었다. 누군가 검사하는 일기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 뻔해서 영어공부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어떤 소설가의 인터뷰에서 들은 내용이다. 장편소설을 한편 쓰려면 짧게는 1년 반에서 길게는 4년 이상의 세월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소설을 쓰는 동안 작가는 작품의 세계에 빠져 살게 되는데 소설을 끝내고 나면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일기를 쓴다고 한다. 써놓은 일기를 읽으며 지난 세월을 되짚어 보고 잃었던 기억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지난 세월이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즐겁고 슬펐던 일, 기억해두고 싶었던 일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지나고 나니 떠오르는 기억이 별로 없다. 새삼 세월이 나의 기억을 잡아먹고사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려서 침과 뜸 치료를 많이 받았던 나의 몸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 엉덩이와 허리, 그리고 무릎 아래 다리에는 뜸에 덴 상처가 크게 남아 있었고 발등의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사이에는 침을 많이 맞아 생긴 흉터가 있었다. 내 기억에 이들 상처는 30대 후반까지도 내 몸에 남아있었다. 몇 년 전 어느 날 샤워를 하고 몸을 말리다 문득 흉터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결코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그토록 깊이 새겨져 있던 흉터도 세월 앞에서는 굴복하고 만 것이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기억이 만들어지는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한다. 나이가 드니 주변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내가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사라져 가고 내가 즐겨 듣던 노래들이 방송에서 사라져 간다. 그들과 연관된 나의 기억들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일기를 쓰기로 했었다. 매일 쓰는 것은 아니고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나 감정이 떠오르는 날만 쓴다.

 

어떤 이의 시에 이런 내용이 있다. 20대에는 30이 되면 큰일 날줄 알았고, 30대에는 40이 되면 세상이 멈출 줄 알았다. 막상 40이 되니 30대가 좋았음을 알았고 왜 그때는 그것을 몰랐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시간이 우리에게 남은 날 중 가장 젊은 날이며 그 시간을 잊고 싶지 않아 나는 일기를 쓴다.


60이 되어 읽게 될 50대의 나의 일기, 70 되어 읽게 될 60대의 일기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지 자못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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