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가방을 내려놓고
라디오에서는 종종 잡음이 섞인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늘 선생님들만 둘러서서 들었다. 우리는 멀찍이서 그 풍경을 바라보며, 세상이 어느새 우리 모르게 조금씩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날도 새벽 품삯을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서던 어머니와 짧게 인사를 나눈 뒤, 나는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운동장에 다다르자 멀리서부터 기운이 달랐다. 아이들이 모두 운동장 한가운데 모여 있었고, 말소리는 없었으며 웅성거림조차 조심스러웠다.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마음속 어딘가가 서늘해졌기 때문이다.
그때 한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별일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줄 맨 뒤에 섰고,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운동장 위로 울려 퍼졌다. 그의 양옆에는 햇빛을 받을 때마다 번뜩이는 구두를 신은 군인들이 서 있었다.
군복에 아직 완전히 익숙하지 않은 듯 옷매무새는 다소 흐트러져 있었지만, 얼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학교에서 군인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 이렇게 많이 모인 모습은 낯설고 불길했다.
교장 선생님은 잠시 말을 멈춘 뒤, 목에 힘을 주어 선언했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 그리고 체격이 좋은 학생들은 앞으로 나오거라. 오늘부터 나라의 명을 받아 군복을 지급받는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귀 주변에서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지는 듯했다. 바람이 멎고 햇빛마저 빛을 잃은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발을 떼지 못했다. 머릿속은 텅 비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더 배우고 싶다는 마음, 아직 끝내지 못한 꿈, 글자를 놓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나라’라는 것이 일상의 바깥에서 갑자기 나를 끌어당긴다는 막막함.
군복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날따라 어머니는 늦게 들어오셨다. 집 안에는 어둠이 먼저 와 앉아 있었고, 고요만이 가득했다.
군복을 마루에 내려놓고 앉아 책가방을 내려놓았지만 손은 계속 떨렸다. 시침질이 어긋난 교복 소매를 만지다 문득, ‘이제 이 옷을 다시 입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칠판 냄새와 연필 가루 냄새가 떠올랐다. 선생님들이 조심스럽게 적어 내려가던 글자들, 그 글자를 다 읽고 쓸 수 있는 날을 바라보며 품었던 희미한 꿈. 그 모든 것이 눈앞에서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세상의 무게를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느꼈다. 가난은 식탁을 비게 할 뿐 아니라, 내가 걸어갈 길마저 좁히고 있다는 사실을.
문 여는 소리가 들린 것은 한참 뒤였다. 어머니였다. 아침보다 더 지친 발걸음, 그러나 어딘가 단단해진 얼굴이었다.
나는 군복을 보여주지도 못한 채 먼저 물었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어머니는 신발을 벗으며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봄이 소식 좀 듣고 왔다.”
그리고 덧붙였다.
“봄이… 일본 간다더라.”
숨이 턱 막혔다. 왜, 어떻게, 봄이가 일본으로.
어머니는 내 표정을 읽고 조용히 설명을 이었다. 일본에서 징용을 겪고 돌아오지 못한 친척,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 그 말들은 모두 ‘살 길’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나는 눈물을 쏟아냈다. 봄이는 여기 있어야 한다고, 왜 꼭 떠나야 하냐고.
어머니는 나를 안아 주었지만 울지 않았다. 눈동자는 젖어 있었으나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울음을 삼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눈빛이었다.
“살려면… 별별 선택을 다 해야 한다. 너도, 나도, 봄이도.”
그 말은 따뜻했지만 슬펐고, 너무도 현실적이었다.
다음 날 새벽, 나는 군복을 입었다. 실핏줄이 도드라진 손으로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며, 이 옷이 어제의 교복보다 훨씬 무겁다는 걸 알았다.
학교 운동장으로 향하는 길, 새벽 공기는 차고 서늘했고 발걸음은 낯선 땅을 밟는 듯 무거웠다.
운동장에는 친구들이 말없이 줄을 서 있었다. 서로를 위로하려는 눈빛도 있었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얼굴도 있었다.
그때 상문이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소 팔았대… 나 집에 돌아가래.”
선생님들은 말없이 그 아이를 돌려보냈다. 상문이가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내 가슴은 또 한 번 깊이 내려앉았다.
돈은 사람의 길을 바꾸지만, 나는 그 길조차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
군복의 거친 감촉이 손에 남았다. 가난은 바람보다 차갑고, 그 바람은 마음까지 흔들어 놓았다.
그날 아침, 희미한 햇빛 아래서 우리는 처음으로 어른들이 살아온 세상의 일부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느꼈다. 두려움은 이미 불안을 넘어, ‘안 될 것만 같은 감각’이라는 거대한 벽이 되어 있었다.
앞으로 무엇이 닥쳐오든,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내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