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_4화

낙동강의 손짓

by 돈미새

7월 말의 공기는 장마가 끝난 뒤의 눅눅함과 운동장의 열기가 뒤섞여 끈적거렸다.


교관은 지도를 펴지 않았다. 손에 든 호루라기를 만지작거리며 대전이 넘어갔고 전주마저 점령되었다는 짧은 말을 던졌다. “상황이 바뀌었다.” 그 한마디에 운동장의 열기가 발목까지 무겁게 내려앉았다.


누군가 밭은기침을 했지만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담장 밖 피난민들의 행렬은 이미 며칠 전부터 거대한 뻘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아이나 길가에 주저앉아 멍하니 우리를 보던 노인들의 눈빛에서, 우리는 이미 끝이 다가왔음을 몸으로 읽고 있었다.


낙동강이라는 이름이 불렸다. 최후의 방어선이라느니, 학도병 전원 투입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웅성거림 속에 섞여 들었다. 교관은 "갈 준비를 해라"라는 말만 남기고 등을 돌렸다.


그날 밤 내무반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나는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은 이미 총을 쥔 모양 그대로 굳어 펴지지 않았다. 지문 사이에 박힌 쇠 비린내가 코끝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운동장에는 트럭 서너 대가 매연을 뿜으며 서 있었다. 교관은 분대 순서대로 우리를 세우더니 무심하게 손짓을 휘둘렀다. 오른쪽은 밀양, 왼쪽은 언양. 가본 적도 없는 지명들이 교관의 손끝에서 툭툭 던져졌다. 그건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버려질 구덩이의 이름 같았다. 앞사람의 발자국이 모래 위를 밟을 때마다 낮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는 소리가 고막을 때릴 때마다 명치끝이 비틀렸다.


아침에 억지로 밀어 넣은 고기 비계가 위장에서 식지 않은 채 출렁거렸다. 입안에는 쓴 침이 고였다가 바짝 말랐다. 운동장이 한쪽으로 기우는 듯한 착각에 시야 가장자리가 검게 타 들어갔다. 구역질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삼켰다. 줄에서 밀려나는 순간, 저 손짓보다 더 나쁜 곳으로 던져질 것 같다는 본능적인 공포 때문이었다.


선택이라는 건 없었다. 그저 앞사람의 등이 움직이는 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발을 뗐다.


“다음.”


교관의 짧은 명령에 나는 앞으로 나갔다. 발바닥에 닿는 모래알 하나하나가 비정상적으로 또렷하게 느껴졌다. 교관의 손끝이 왼쪽을 가리켰다. 살았는지 죽으러 가는지 따위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아침에 먹은 고기 비계가 식도 끝까지 역류해 올라올 뿐이었다. 나는 입안으로 고인 쓴 물을 삼키며 트럭 짐칸으로 몸을 던졌다.


트럭 짐칸에 오르자 녹슨 철판 바닥의 진동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기름 냄새와 흙먼지가 코를 찔렀다. 옆 트럭에 올라탄 용식과 눈이 마주쳤으나, 녀석은 부어오른 제 턱만 만지며 허공을 봤다. 우리는 서로를 아는 체할 여유조차 없었다. 트럭이 덜컹거리며 학교를 빠져나갈 때, 운동장에 남은 모래바람이 우리 뒤를 쫓아왔다.


트럭은 계속 덜컹거렸다. 학교 담장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그 진동은 한동안 발바닥에 남아 있었다.


언양의 깔딱 고개는 이름값도 못 하게 완만했다. 차라리 깎아지른 절벽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숨을 곳이라고는 듬성듬성한 소나무 몇 그루뿐이라 어디에 엎드려도 내 정수리가 달빛에 노출될 판이었다. 발가벗겨진 채 벌판에 세워진 기분이라 등이 자꾸 오싹거렸다.


보급병이 탄약을 나눠줬다. 실탄 여덟 발이 든 클립 하나. 손바닥에 올려놓자 훈련 때 얹어두던 돌멩이와는 전혀 다른 무게가 느껴졌다. 차갑고 단단한 살의였다. 탄창에 실탄을 밀어 넣을 때마다 ‘찰칵’ 하고 쇠가 물리는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이제 내 손에 든 건 빈 막대기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가슴팍에 구멍을 낼 괴물이 손 안에서 덜컹거렸다.


옆자리 김 상병은 내내 말이 없다가 담배 연기를 뱉으며 툭 내뱉었다.


“야, 학도병. 총구 좀 내려라. 내 발가락 뚫리기 싫으니까.”


그 눈엔 연민 따위 없었다. 내가 죽는 것보다 내가 실수해서 지가 다치는 게 더 걱정인 눈치였다. 나는 서둘러 총을 돌렸다. 방공호 안은 흙과 땀, 찌든 담배 냄새가 뒤섞여 숨을 쉴 때마다 쉰내가 진동했다.


“잠 오면 허벅지 꼬집어라.”


김 상병 말대로 손톱이 살 속으로 파고들게 허벅지를 눌렀다. 잠이 쏟아지는데 겁이 나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나뭇잎이 스칠 때마다 심장이 먼저 떨어졌다. 바람인지 발소리인지 가려낼 수 없어 총을 쥔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오줌이 마려웠지만 몸을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총을 쏘는 순간 같은 건 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오줌을 참은 채, 언제 날아올지 모를 쇳덩이를 기다리다 목이 점점 굳어갔다. 숨을 삼킬 때마다 혀가 말라붙었고,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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