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_5화

해 뜨는 쪽으로

by 돈미새

회색빛이 번지자 산의 윤곽이 칼날처럼 드러났다. 어둠이 걷힐수록 숨을 곳이 사라졌다. 밤새 우리를 덮어주던 이불이 벗겨지는 기분이라 등이 서늘했다. 김 상병은 고개 아래를 훑으며 낮게 읊조렸다.


“해 뜨면 더 조심해라. 이제 다 보이니까.”


고개 아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제는 검은 덩어리였던 곳이 이제는 돌무더기와 웅덩이까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저 길로 누가 올라온다면 우리는 그대로 과녁이 될 판이었다. 햇빛이 헬멧 위를 스칠 때마다 나는 자꾸 머리를 숙였다.


밤새 쥐고 있던 총이 손바닥에 달라붙은 것 같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굳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실탄 여덟 발. 숫자는 분명했지만, 그중 한 발이라도 내 손을 떠난 뒤의 풍경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 반대편에서 자갈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가만있어.”

김 상병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총구가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검게 타들어 가던 시야 끝에서 늙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났다. 피난민이 버린 것인지, 주인을 잃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소는 우리를 힐끗 보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마른풀을 뜯었다. 누군가 길게 숨을 내뱉는 순간이었다.


‘탕.’


귀가 먹먹해지는 파열음이 산을 긁었다. 소는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졌다. 총을 쏜 옆 진지 병사는 넋이 나간 채 서 있었다. 누구도 욕하지 않았고 누구도 소리치지 않았다. 김 상병이 무심하게 걸어가 그 녀석의 총을 내려놓게 했을 뿐이다.


소의 몸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아침 햇빛을 받은 핏물이 유난히 시커멓게 보였다. 비릿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찔렀다. 훈련소에서 맡던 쇠 냄새와는 달랐다. 생생하고 역한 냄새였다. 억지로 삼켰던 고기 비계가 식도 끝까지 다시 치밀어 올랐다. 나는 토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김 상병은 내 쪽을 한 번 보더니 다시 고개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무심한 눈이었다. 나는 다시 총을 쥐었다. 손바닥에 고인 땀 때문에 개머리판이 미끄러웠다. 적은 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누군가의 몸에 구멍을 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게 소든 사람이든 상관없다는 듯이.



소의 사체는 고개 아래 길목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치울 인력도 없었고, 누군가에게 그럴 여유를 허락하는 사람도 없었다. 첫날에는 시커먼 핏물과 터진 내장 냄새에 다들 헛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틀이 지나자 그것은 그저 원래 거기 있었던 바위나 나무처럼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썩는 냄새와 부풀어 오른 소의 배 위로 파리 떼가 까맣게 내려앉아 웅웅거렸고,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단내 섞인 악취가 방공호 안쪽까지 질척하게 밀려들었다.


우리는 그 냄새 속에서 밥을 씹었고, 그 냄새를 덮고 잠을 잤다.


전쟁은 빗발치는 총알보다 먼저, 지독한 지루함의 얼굴로 우리를 찾아왔다. 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매일 아침 안개가 걷히고 해가 뜨면, 우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돌무더기와 소나무 껍질을 조준하며 의미 없는 시간들을 흘려보냈다. 총구 위에 얹어두었던 돌멩이는 이제 없었지만, 여덟 발의 실탄이 든 총은 날이 갈수록 손 안에서 더 무겁고 거추장스러워졌다.


“야, 학도병. 학교 가면 뭐 하고 싶냐.”


김 상병이 며칠 만에 처음으로 사적인 말을 꺼냈다. 그는 흙투성이가 된 손톱 사이를 대검 끝으로 파내고 있었다. ‘서걱서걱’ 하며 쇠가 손톱 밑을 긁는 소리가 적막한 공기를 타고 귀 안쪽을 간지럽혔다. 나는 대답 대신 마른침을 삼켰다. 학교라는 단어가 혀 위에서 낯설게 굴렀다. 교실 냄새나 분필 가루 같은 것들은 이제 아주 오래전에 읽다 만 소설의 한 문장처럼 까마득했다.


“그냥… 잠이나 푹 잤으면 좋겠습니다.”


김 상병은 코로 짧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는 대검을 칼집에 밀어 넣으며 고개 아래 길 끝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곳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매연을 뿜으며 지나가던 아군 트럭도, 짐을 이고 지던 피난민의 행렬도 끊긴 지 오래였다. 길은 텅 비어 있었고, 그 공백이 주는 안도감이 독처럼 서서히 우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잠은 집에 가서 자라. 여기선 눈 뜨고 자는 법부터 배우고.”


그날 오후, 우리는 소의 사체 근처에 핀 이름 모를 꽃들을 보며 이유 없이 낄낄거렸다. 옆 진지의 녀석은 군화를 벗어 발가락 사이에 눌어붙은 흙을 털어냈고, 나는 헬멧을 벗어 땀에 절어 떡이 된 머리를 긁어댔다. 공포는 굳은살처럼 딱딱해져 더는 통증을 주지 않았다. 적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방공호 안을 옅은 안개처럼 채우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자리에는 허기가 먼저 찾아왔다. 우리는 다음 식사 시간에 나올 고기 비계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먼지 낀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때였다.


길 끝, 아지랑이가 이글거리던 지평선 너머에서 아주 작은 먼지 구름 하나가 일어난 것은. 처음에는 바람에 흩날리는 흔한 흙먼지쯤으로 여겼다. 그래서 누구도 총을 고쳐 쥐지 않았다. 김 상병조차 하품을 하며 뻑뻑한 눈을 비비던, 그런 평화로운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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