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침묵
먼지 구름은 금세 사라질 것처럼 얇았다. 지평선 위로 일렁이는 아지랑이 중 하나라고 자위해도 무리는 없었다. 하지만 소의 사체 쪽에서 파리 떼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며 웅웅거렸고, 그 진동이 눅눅한 고막을 기분 나쁘게 자극했다. 나는 총과 몸 위에 내려앉은 먼지를 손에 힘을 빼고 가볍게 털었다. 거친 흙가루와 군복이 거칠게 느껴졌다. 여덟 발. 숫자는 변하지 않았는데, 손바닥에 실리는 무게는 어제보다 더 눅눅하고 불길했다.
“저거….”
누군가 말을 꺼내다 말았다. 길 끝에서 먼지가 다시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사라지지 않았다. 테두리가 뭉개지지 않고 느리게, 아주 느리게 우리 쪽으로 기어 왔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낮은 포복으로 기어 오던 무전병이 흙바닥에 처박히며 수화기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예? 안동이 뚫렸다고요? 밀양까지 내려왔단 말입니까!”
잡음 섞인 비명이 참호 안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뒤이어 소대장이 아군 진지 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군모는 어디에 버렸는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굵은 핏줄이 터질 듯 솟아 있었다. 그는 허리를 꺾은 채 절규했다.
“준비해! 강길 타고 온 놈들이 예상보다 빠르다! 낙동강까지 다 밀렸어!”
예측은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적들은 안동을 지나 낙동강 물길을 타고 귀신처럼 남하하고 있었다. 밀양이 넘어갔다면 이곳 울산으로 들어올 지원군은 없었다. 양산과 김해에 낙동강을 배수진 삼아 최후의 방어선을 쳤을 터였다. 우리는 지원군을 기다리는 부대가 아니었다. 본대가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이 고갯마루에 버려진, 살아있는 제물일 뿐이었다. 다 죽을 거라는 공포가 땀 냄새 섞인 공기를 타고 진지 전체로 번졌다.
김 상병이 하품을 멈췄다. 눈을 비비던 손이 허공에서 딱 멎었다. 먼지 속에서 형체 하나가 갈라져 나왔다. 본진보다 훨씬 앞서 걷는 정찰병이었다. 소총을 비스듬히 쥐고 고개를 까닥이며 길 좌우를 살피는 꼴이 딱 썩은 고기를 찾는 들개였다. 그들은 멀찍이 멈춰 서서 소의 사체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나는 방아쇠에 올린 손가락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힘을 주었다.
김 상병의 목소리가 흙바닥을 타고 지독하게 낮게 깔렸다. “아직 쏘지 마. 탱크 나올 때까지….”
하지만 전쟁은 우리의 인내심 따위 기다려주지 않았다.
‘휘이익-’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먼저였다. 적은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으나, 의심스러운 구덩이는 일단 지우고 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쾅! 콰콰쾅!’
고개 마루가 통째로 뒤집혔다. 포탄이 박히는 순간, 땅이 위아래로 미친 듯이 출렁였다. 이건 고막이 터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뇌수가 흔들리고 장기가 한꺼번에 꼬여 뒤집히는 물리적인 파괴였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입을 벌리는 순간 달궈진 흙먼지와 타버린 화약 냄새가 폐부 깊숙이 칼날처럼 박혔다.
“으아악! 내 눈! 눈!”
옆 진지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아까 트럭이 아니냐고 묻던 그 녀석이었다. 녀석의 얼굴 한쪽은 이미 흙과 피가 반죽처럼 엉겨 붙어 형체를 잃어버렸다. 다시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지옥이 발밑에서 솟구쳤다. 나는 방공호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손톱이 빠지도록 진흙을 긁어댔다. 살려달라는 기도조차 사치였다. 고립되었다는 자각, 지원군은 오지 않는다는 절망이 포연보다 더 짙게 시야를 가렸다.
“학도병! 정신 차려! 쏴!”
누군가 내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김 상병이었다. 그의 한쪽 귀에서는 검붉은 핏물이 울컥거리며 턱밑으로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넋이 나간 내 총구의 방향을 억지로 아래로 꺾었다. 포탄 구덩이 너머로 수만 마리의 인간들이 파리 떼처럼 능선을 기어올랐다.
비명을 지르던 녀석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툭, 끊겼다. 터진 호박처럼 으깨진 녀석의 머리 위로 흙더미가 무심하게 덮였다. 김 상병이 피 섞인 침을 내뱉으며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나는 떨리는 손가락을 방아쇠 울 안으로 밀어 넣었다. 훈련소에서 억지로 삼켰던 그 고기 비계의 역한 기름맛이 식도까지 치밀어 올랐다. 손바닥에 고인 땀 때문에 총이 미끄러웠지만, 이제는 놓을 수 없었다. 지금 당기지 않으면 저 파리 떼가 내 눈을 파먹으러 올 것이었다.
나는 조준경에 눈을 대지도 못한 채, 눈앞에 번지는 흙먼지를 향해 첫 발을 내뱉었다.
‘탕-!’
어깨를 탈골시킬 듯한 둔탁한 반동과 함께 여덟 발 중 한 발이 사라졌다. 이제 내 손에 남은 생존의 기회는 일곱 발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