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_7화

짐승의 시간

by 돈미새

노리쇠가 뒤로 툭 멎었다. 빈 총이었다. 여덟 발은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손가락 끝은 감각이 없는데 손바닥에만 식은땀이 차서 총이 자꾸 미끄러졌다. 헬멧 안으로 흘러든 땀 때문에 눈이 따가워 죽을 것 같았다. 흙과 땀, 피로 범벅이 된 손으로 눈을 벅벅 문질렀다.


적 본대는 우리를 보지도 않았다. 거대한 쇳덩어리들이 자갈을 씹어 돌리는 소리만 냈다. 놈들은 그냥 양산 쪽으로 꾸역꾸역 흘러갔다. 그 거대한 흐름에서 떨어져 나온 찌꺼기 같은 놈들 몇몇이 능선을 타고 기어오르는 게 보였다.


“탄약! 탄약!”


비명을 질렀다. 옆을 보니 아까 머리가 터져 나간 그 녀석이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녀석에게 기어가서 끈적한 탄띠 주머니를 손톱이 빠지게 찢어발겼다. 손가락 끝에 닿는 게 녀석의 식어가는 살점인지 흙인지 구분도 안 됐다. 피가 묻어 미끌거리는 실탄 뭉치를 내 총속으로 쑤셔 넣었다.


철컥.


친구의 유골이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총구를 내밀었는데 조준경 너머로 적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손이 떨리는 게 아니라 온몸이 진동했다. 속이 뒤집혀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냥 총구만 참호 밖으로 내밀고, 눈을 감은 채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탄환은 허공의 먼지나 가르며 날아갔다. 누굴 맞히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당장 내가 죽을 것 같아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였다.


‘퍽!’


눈앞이 번쩍했다. 고개가 꺾이면서 바닥에 처박혔다. 거친 손아귀가 멱살을 잡아채 나를 흔들었다. 김 상병이었다. 한쪽 귀에서 검붉은 피를 줄줄 흘리는 꼴이 귀신같았다.


“이 씨발… 너 지금 어디다 쏴! 죽고 싶어?”


입안에 고인 핏물을 삼키며 더듬거렸다. “무, 무서워서… 사람이… 자꾸 보여서….”


김 상병이 내 멱살을 바싹 끌어당겼다. 지독한 땀 냄새와 화약 냄새가 훅 끼쳤다. 놈이 내 귓가에 대고 짐승처럼 씹어 뱉었다.


“야, 학도병. 저놈들 양산 넘으면 바로 네 집이야. 네가 안 죽이면, 저 새끼들이 네 엄마 목을 딸 거라고. 알아들어? 쏘라고, 씨발!”


어머니. 그 말이 머릿속을 포탄처럼 때렸다.


“지금 안 쏘면 네 엄마가 죽는다고! 네 엄마가!”


김 상병은 총을 내 가슴팍에 거칠게 처박았다. 떨리는 손으로 소총을 고쳐 쥐었다. 양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적들이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이제 저건 사람이 아니었다. 내 엄마를 죽이러 가는 짐승들이었다. 조준경 너머 적의 가슴팍을 겨눴다. 손가락의 떨림이 멈췄다. 아니, 차갑게 식어버렸다.


밤이 되자 차라리 숨이 좀 쉬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해가 있을 때는 눈, 입술, 비명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손가락을 붙잡았다. 그런데 어둠이 내리자 적들은 그냥 움직이는 그림자가 됐다.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남편이라는 실체가 사라졌다. 밤 위를 기어 다니는 검은 얼룩만 남았다.


그래서 밤이 편했다. 보이지 않아서라기보다,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았다.


그림자가 움직이면 당겼다. 멈추면 한 번 더 당겼다. 안 움직일 때까지 계속 쐈다. 망설일 틈도,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총구가 먼저 반응했고 몸은 그냥 따랐다. 그림자가 쓰러져도 마음속에선 아무 소리도 안 났다.


시간이 갈수록 손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나는 저 뒤에서 남의 일 보듯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총소리가 날 때마다 내가 사람이 아닌 쪽으로 조금씩 밀려나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가장 어두운 시간이 왔다. 해뜨기 직전, 별은 꺼졌는데 빛은 아직 안 온 그 먹먹한 시간. 적들이 움직였다. 가장 어두울 때가 가장 안전하다는 걸 놈들도 아는 모양이었다.


여름인데도 땅에서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방공호 바닥에 엎드린 배가 시렸다. 땀에 젖은 군복이 식으면서 몸이 덜덜 떨렸다. 이가 딱딱 부딪혔다. 소리가 들릴까 봐 이를 악물었지만 소용없었다.


이게 추워서 떠는 건지, 아니면 내가 너무 멀리 와버려서 떠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손은 계속 철컥거렸고, 몸은 계속 떨렸다.


지평선 너머로 바늘귀만 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투가 다시 느려졌다. 그림자들이 다시 형체를 찾기 시작했다. 조준경 너머로 사람의 윤곽이 보였다. 그 순간, 밤새 잠들었던 역함이 다시 터져 나왔다.


속이 뒤집혔다. 방금 전까지 기계처럼 당기던 방아쇠가 갑자기 바위 덩어리처럼 무거워졌다.


밤은 나를 지켜준 게 아니었다. 내가 사람이 아니어도 되게끔 가려준 것뿐이었다.


달궈진 총을 끌어안고 이제 막 밝아오는 하늘을 봤다. 안도가 아니라 무서웠다. 짐승의 시간이 끝나고 있었다. 다시 지옥 같은 사람의 시간을 버텨야 할 아침이었다.

월, 수, 금 연재
이전 22화전쟁_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