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_8화

허기

by 돈미새

며칠을 깨어 있었는지 계산하는 건 이미 포기했다. 눈꺼풀 안쪽에 날카로운 모래알이 가득 찬 것 같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안구가 긁히는 통증이 뇌수까지 전해졌다. 관자놀이는 누군가 망치로 두드리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웅웅거렸고, 입술은 가뭄 든 논바닥처럼 갈라져 피딱지가 앉았다.


“처먹어. 그래야 안 죽는다.”


김 상병이 흙먼지 구덩이에서 주먹밥 하나를 던져주었다. 소금기로 대충 뭉친 잡곡 덩어리였다. 씹기도 전에 입안의 깔깔한 수분이 몽땅 빨려 나갔다. 혀가 입천장에 쩍쩍 달라붙었다. 침이 나오지 않아 목구멍이 꽉 막혔다. 나는 그것을 어금니로 으깨서 억지로 밀어 넣었다. 모래와 덜 익은 곡식이 식도를 긁으며 내려갔다. 위장이 뒤틀리며 신물이 올라왔다.


부족했다. 지독하게 부족했다. 뱃속에서는 이제 배고픔이 아니라 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조준경 너머로 적들이 보였다. 이제 놈들은 어머니를 죽이러 오는 도살자도, 이데올로기의 적도 아니었다. 내 잠을 가로막고, 이 지옥 같은 배고픔을 끝내지 못하게 방해하는 '치워야 할 고깃덩어리'일뿐이었다. 손가락이 방아쇠 울을 신경질적으로 갉아댔다.


“나와라… 제발 좀 기어 나와라.”


입 밖으로 단내가 섞인 저주가 새어 나왔다. 빨리 놈들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살의는 숭고한 복수심이 아니라, 지독한 짜증과 피로에서 기어 나왔다. 한 놈이 고꾸라질 때마다 내 머릿속엔 '하나 줄었다'는 기계적인 안도감만 스쳤다. 나는 이제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밀린 숙제를 해치우는 기계처럼 굴었다.


그때, 참호 밖 길바닥에 처박힌 소의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포탄 파편에 배가 갈라져 내장이 쏟아진 채 며칠째 썩어가던 짐승의 시체. 파리 떼가 들끓고 시커멓게 변한 고기 덩어리에서 풍겨오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며칠 전만 해도 구토를 유발하던 그 냄새가, 지금은 기묘하게 나를 자극했다.


‘저거라도 베어 먹었어야 했는데.’


미친 생각이 뇌를 지배했다. 썩어서 문드러진 저 소 다리 살이라도 뜯어다가 입에 넣을 수 있다면. 파리가 들끓는 저 핏물 고인 내장이라도 씹어 돌릴 수 있다면, 이 창자를 꼬아대는 허기가 멈출까.


나는 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아릿하게 조여왔다. 친구의 머리가 터져 나가고 사람이 시체가 되어 뒹구는 구덩이 안에서, 나는 썩어가는 짐승의 비계덩어리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감이 구정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는 이제 학생도 소년도 아니었다. 썩은 고기를 탐하는 들개보다 나을 게 없었다.


옆에서 김 상병이 마른침을 뱉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나는 놈을 비웃었다. 너도 한 사흘만 더 굶으면 저 소 시체로 기어가서 이빨을 박을 거면서. 우린 이미 사람이 아니니까.


“야, 학도병. 너 눈이 왜 그래. 너 지금 미쳤어.”


김 상병이 움푹 파인 내 눈을 보며 뒷걸음질 쳤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총구를 고쳐 잡았을 뿐이다. 조준경 속으로 적이 다시 나타났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저놈에게 가족이 있는지, 저놈이 죽을 때 얼마나 아플지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저놈을 빨리 치워야 내가 한숨이라도 자고, 뭐라도 씹을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손가락이 기계적으로 튕겨 나갔다.


‘탕-!’


어깨를 때리는 반동조차 이제는 감각이 없었다. 쓰러지는 적을 보며 나는 갈라진 입술을 핥았다. 8월의 뙤약볕 아래, 소의 썩은 냄새와 화약 연기가 뒤섞인 공기가 달콤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제 내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도덕도, 공포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조차 허기에 잡아먹혔다. 오직 살의와 굶주림만 남은 괴물이 방공호 바닥에 엎드려 다음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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