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증이 된 계급장
낙동강으로 진지를 옮기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깔딱 고개의 눅눅한 흙냄새를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며칠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발바닥이 지면에 닿는 느낌조차 비현실적이었다. 걷고는 있었지만, 마치 깊은 물속을 유영하는 것 같은 몽롱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이동하는 길목에서 본 도시는 처참했다. 폭격이 훑고 지나간 자리마다 건물의 잔해가 가시처럼 돋아 있었다. 길가에는 누군가 버리고 간 보따리와 깨진 사기그릇들이 흩어져 있었다. 예전 같으면 그 주인을 걱정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내 군화 끝에 걸리는 돌멩이들을 피해 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슬픔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지독한 귀찮음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기엔 내 몸 하나를 지탱하는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전체 인원 중에 반도 안 남았단다. 다들 어디서 죽었는지 보이지도 않아.”
전령이 툭 던진 말에 대열이 술렁였다. 오십 명 중 스무 명 남짓. 함께 주먹밥을 나눠 먹던 아이들이 어디선가 시체가 되어 썩어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하게 아파왔지만, 그 통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수첩을 꺼내 들었다. 나는 이 구덩이에서 드물게 글을 알고 셈이 빠른 놈이었다. 전쟁은 내게서 소년의 감성을 앗아갔지만, 대신 숫자를 다루는 기계적인 정교함을 주었다. 친구의 부재를 슬퍼하기보다, 죽은 자들의 이름을 지우고 남은 자들의 입에 들어갈 쌀알의 개수를 계산하는 것이 더 익숙해졌다.
“스물아홉 명 결원. 보급품은 이틀 치 남았습니다. 죽은 놈들 몫을 합치면 사흘은 버팁니다.”
내 목소리는 건조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급품의 증식’으로 환산하는 내 보고에 소대장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양 전투에서 보여준 내 살의와 이런 비정한 효율성 덕분에, 김 상병은 병장을 달았고 나는 학도병 중 유일하게 일병 계급장을 어깨에 얹었다.
강바람에 섞인 비릿한 물 냄새가 끼쳤다. 낙동강이었다.
나는 소총을 고쳐 매며 여동생 봄이를 생각했다. 가난 때문에 남의 집으로 보냈던 막내. 그 집 식구들과 일본으로 피난을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멍하니 강물을 바라보았다.
‘다행이다.’
그것은 아주 미세하고 희미한 안도감이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의 밑바닥에는 기묘한 소외감이 깔려 있었다. 동생은 이제 포탄 소리도, 썩은 고기 냄새도 없는 먼 곳으로 떠났다. 그곳과 이곳 사이에는 거대한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나는 이제 동생이 아는 오빠가 아니었다.
동생이 살아서 좋다는 마음 뒤로, ‘이제 나만 잘 버티면 된다’는 이기적인 해방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공포가 동생의 행운 뒤로 숨어버린 것이다.
문제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도 아마… 어디론가 피하셨겠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무너진 도시의 잔해를 지날 때마다 그 희망은 조금씩 깎여 나갔다. 적들이 지나간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다. 탱크의 궤도가 지나간 자리마다 비명이 묻혔을 것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가 살아계실 거라는 상상을 멈췄다. 아니, 멈춰야만 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신다고 믿으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총을 버리고 집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여기서 도망칠 수도, 어머니를 찾으러 갈 수도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보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셨을 거라고 단정 짓는 편이 마음 편했다. 그것은 불효라기보다, 살기 위한 단념에 가까웠다.
“학도병, 아니 김 일병. 안색이 안 좋다. 어머니 생각하냐?”
김 병장이 툭 쳤다. 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그냥… 발이 너무 아파서요.”
거짓말이었다. 발보다 마음이 먼저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감당해야 할 그 지독한 그리움과 죄책감이 무서워, 나는 스스로 어머니의 영정 사진을 마음속에 걸어버렸다.
나는 낙동강의 흙탕물을 내려다보았다. 짐승이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소년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 입에 들어올 주먹밥 한 덩이만을 유일한 진리로 믿기로 했다.
어머니, 미안해요.
나는 마음속으로 아주 작게 읊조리며, 내 안에 남은 마지막 온기를 강물에 흘려보냈다. 그리고 다시 무거운 군화를 내디디며 유령처럼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