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먹고 자란 계급장
지리산의 가을은 유난히도 일찍 찾아왔다. 하지만 우리가 받은 명령은 가을의 정취만큼이나 서늘했다.
11사단 9 연대.
상부의 지시는 단호한 '견벽청야(堅壁淸野)'였다.
적의 은신처가 될 만한 모든 것을 비워내라는 작전.
그것은 결국 산촌 사람들의 목숨까지 비워내라는 뜻이었다.
그 잔인한 작전의 한가운데서, 나는 행정 보급 선임을 잃었다. 방공 지시를 전달하던 중이었다. 멈추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천천히 다가오던 그 남자의 품에서 폭발이 일어났을 때, 소리보다 먼저 진공의 침묵이 우리를 덮쳤다. 내게 셈을 가르치고 장부 정리법을 알려주던 선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흩어졌다.
그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내 어깨에는 상병 계급장이 얹혔다.
“축하한다, 김 상병. 선임 몫까지 잘해봐라. 다들 네가 일을 잘해서 올라간 거라고 하더군.”
중대장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지만, 나는 그 손길이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내 진급은 실력이 아니라 선임의 죽음이 남긴 빈자리였다. 나는 선임의 유품이 된 낡은 수첩을 물려받아 그의 자리를 채웠다. 사람들은 내가 유능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내가 죽은 자의 살점을 뜯어먹고 자라난 괴물처럼 느껴졌다. 그 불편한 감정을 씻어내기 위해 나는 더욱 기계적으로 장부에 매달렸다.
전략은 더 잔인하게 진화했다. 적을 도왔을 '가능성'은 곧 '확정된 죄'가 되었다. 1951년 2월의 추위가 가시지 않은 거창 신원면의 박산 골짜기. 우리는 그곳에 수백 명의 주민을 몰아넣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계곡의 바람 소리와 섞여 귀를 찢었지만, 나는 선임의 죽음 이후 내 마음속에 들어앉은 그 지독한 냉소를 꺼내 들었다.
“쏴라! 한 놈도 남기지 마라!”
명령이 떨어졌을 때, 내 손가락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M1 소총의 반동이 어깨를 칠 때마다 골짜기의 숫자들이 하나씩 지워졌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나는 죽어가는 이들을 사람이 아닌 '장부상의 오차'로 취급했다. 분노를 그들 탓으로 돌려야만 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증오를 연기했다.
그 피비린내 나는 골짜기를 지나 대구 본대로 합류했을 때, 내 손에는 소총 대신 보급 장부가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다. 죽음은 계산식이 되었고, 계산은 곧 신뢰가 되었다. 1951년 9월. 가야산 자락을 덮은 습한 열기 속에서도 나는 무감각하게 수첩을 꺼내 들었다. 선임의 필체가 간간이 남아 있는 그 수첩 위로 내 비정한 숫자들을 덧칠했다.
“현재 잔여 탄약 2,200발. 쌀은 반 가마 남았습니다. 다음까지는 충분합니다.”
내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이제 전쟁은 내게 숫자의 정렬일 뿐이었다. 한 놈을 지우면 탄약 한 발이 소모되고, 한 놈이 사라지면 쌀 한 홉이 남는다. 이 명쾌한 공식 속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사치였다. 이동하는 대열 옆으로 파괴된 마을들이 스쳐 지났다. 불탄 기둥과 무너진 장독대. 예전 같으면 저 폐허 속에 어머니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숨이 막혔겠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저 정도 화염이면… 생존 확률은 5% 미만이다.’
나는 황급히 확률을 계산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가 저 불길 속에서 나를 불렀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차단하기 위해, 나는 뇌를 풀가동했다. 희망은 전투력을 갉아먹는 기생충이었고, 단념은 나를 살리는 유일한 방패였다. 내가 상병을 달고 이 비정한 장부를 맡게 된 것은, 슬픔을 숫자로 치환하는 비겁한 기술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야, 김 상병. 너 진짜 무섭다. 너 정말 예전에 시 쓰던 그 학생 맞냐?”
김 병장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그는 병장이 된 뒤로 오히려 눈이 맑아졌고, 그만큼 겁이 많아졌다. 인간으로 돌아가려는 그가 내게는 위태로워 보였다.
“시 쓰던 놈은 거창 골짜기에서 죽었습니다. 지금은 선임의 자리를 훔친 김 상병만 남았죠.”
나는 대답 대신 총끈을 조였다. 밤이 되면 다시 냉기가 올라올 것이다. 겨울의 끝자락이었지만 내 영혼은 동상에 걸린 듯 감각이 없었다. 내 마음속, 어머니의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빈칸에는 선임의 죽음과 사살 숫자, 보급품의 수량만이 문신처럼 새겨졌다. 나는 유령처럼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내 발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남의 죽음을 딛고 선 자는 소리를 내지 않는 법이니까.
1951년 봄, 대구는 거대한 쓰레기장인 동시에 화려한 지옥이었다. 거창의 골짜기와 낙동강의 흙탕물을 지나온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휴가. 전선의 감각을 떼어내지 못한 병사들에게 후방의 공기는 너무 달아서 오히려 메스꺼웠다.
중앙통 인근의 어두운 골목에는 분 냄새와 시체 썩는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보급병인 나는 대구 본대 창고를 드나들며 미군들이 흘린 C-레이션 박스와 뒷시장에서 흘러나온 물자들을 숫자로 맞췄다. 창고 밖에는 뼈만 남은 피난민 아이들이 구걸을 하며 줄을 섰다.
“상병님, 저 애들 주먹밥이라도 좀… 장부에서 조금만 빼면 안 됩니까?”
갓 전입 온 신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선임의 유품인 수첩을 탁 덮으며 녀석의 턱밑으로 총구를 바짝 들이밀었다.
“야, 네 대가리 총으로 날려줄까? 그럼 네 밥 저 애들 주면 되는데. 어때, 할래?”
내 눈엔 살의조차 없었다. 그저 명쾌한 산식을 제안하는 기계적인 냉담함뿐이었다. 신병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나는 비웃으며 총을 거두었다. 밤이 되면 우리는 자갈마당 사창가로 숨어들었고, 나는 모르핀과 대마의 매캐한 연기 속으로 도망쳤다. 환각 속에서만 거창에서 쏘아 죽인 아이들의 눈망울이 흐릿해졌다. 나는 전장에서도, 이곳 대구에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사냥해야만 견딜 수 있는 괴물이었다.
휴가가 끝나갈 무렵, 헌병대 근처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그는 북한군이 밀고 내려올 때 자식 내외와 함께 고향을 떠나 양산을 거쳐 부산까지 피난을 갔던 분이었다. 노인은 내 손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우리 식구들 다 부산 길바닥에서 굶어 죽었을 게야. 그 난리통에 우리 아들 내외를 자네 어머니가 어찌나 챙겨주셨는지... 덕분에 부산까지 무사히 내려가 친척 집에 몸을 의지할 수 있었네.”
노인은 인천 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이 서울 근교까지 도망갔다는 소식에 대구에 남겨진 가족들이 걱정되어 부랴부랴 올라오는 길이라고 했다. 노인이 내민 것은 꾀죄죄한 종이봉투 하나였다. 봉투 겉면에는 내 이름과 생김새가 서툰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 아주머니가 나를 만나자마자 이걸 꼭 전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더군. 글을 모르는 분이라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겨우 쓰신 모양이야.”
봉투 안에는 낡은 내 사진 한 장과 비뚤비뚤한 글씨로 적힌 편지가 들어 있었다.
[나의 아들아, 엄마는 무사히 부산 친척 집에 잘 있다. 군인들 트럭을 얻어 타고 내려와서 큰 고생은 안 했으니 걱정 말거라. 밥 잘 챙겨 먹고 꼭 살아만 있어 다오.]
순간, 대마의 환각이 깨지듯 머릿속이 날카로운 통증으로 번뜩였다. 억지로 눌러 죽였던 '어머니'라는 존재가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나는 거창의 골짜기에서 총구 앞에 선 이들을 '치워야 할 고깃덩어리'로 사냥하며 방아쇠를 당겼는데, 나의 어머니는 그 지옥 같은 피난길에서도 남의 목숨을 살리며 내 사진을 품고 계셨다.
수첩을 쥔 손이 떨렸다. 장부 위의 숫자들은 순식간에 의미를 잃고 잉크 얼룩으로 변했다. 어머니는 부산에 살아계신다. 하지만 그 아들은 대구의 사창가에서 환각에 취해 있고, 남의 어머니들을 장부상의 오차로 취급하며 사냥해 버린 괴물이 되어 있었다.
울컥, 목구멍까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반가움이 아니라 지독한 수치심과 공포였다. 괴물이 되어버린 아들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 나는 그 노인 앞에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 알겠습니다. 가보시죠.”
나는 편지를 품에 쑤셔 넣으며 차갑게 돌아섰다. 하지만 내딛는 발걸음마다 부산의 바닷바람이 따라붙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품 안에서 대마 뭉치를 꺼냈다. 이 지독하게 깨끗한 어머니의 사랑을 잊으려면, 더 깊은 안개가 필요했다. 1951년의 봄, 대구의 거리는 사냥감의 피 냄새 대신 썩어가는 영혼의 냄새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