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부의 결손
트럭은 비명을 지르며 북으로 향했다. 경주 인근의 산세가 멀어지고, 태어나 처음 마주한 서울이 눈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서울은 수도가 아니라 지독한 위선의 소굴이었다. 무너진 건물 사이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그 풍경보다 나를 미치게 만든 건 거리의 사내들이었다.
트럭 밖으로 보이는 사내들은 말쑥했다. 구두를 닦거나, 누군가와 담소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는 그들의 사지는 멀쩡했다. 피와 화약 냄새에 절어있는 우리와는 종(種) 자체가 다른 생물처럼 보였다.
나는 소총을 쥔 손목에 힘을 주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누군가는 거창의 골짜기에서 아이를 쏘고, 누군가는 죽은 선임의 피 묻은 수첩을 품고 미쳐가고 있는데, 저들은 왜 이곳에서 평화로운 유령처럼 걷고 있는가. '누구는 개처럼 끌려가 죽고, 누구는 유령처럼 평화를 누린다.' 내 장부의 수식이 근간부터 흔들렸다. 그들을 향해 총구를 돌리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나는 비릿한 침을 뱉는 것으로 갈음했다. 서울은 전방보다 더 지옥 같은 불공평으로 가득 찬 도시였다.
부대가 배치된 곳은 이름 없는 고지였다.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적군과 아군이 대치했다. 올라가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총탄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교차했다. 하지만 거리가 멀었다. 그 묘한 거리감이 주는 안전함은 인간을 기괴하게 만들었다.
나는 고지 꼭대기에서 적군을 내려다보며 까불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광대처럼 춤을 추고 몸을 흔들며 적들을 조롱했다.
"야! 이 빨갱이 새끼들아! 여기다! 내 대가리를 맞춰보라고!"
공포가 임계점을 넘으면 뇌는 그것을 유희로 오역한다. 나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 재롱을 떠는 미친 사냥꾼이었다. 입 안이 바싹 말라 담배 한 대가 간절했다. 나는 소나무 대에 등을 기대고 주머니를 뒤졌지만, 담배가 없었다.
"아, 씨... 어디 갔어."
나는 투덜대며 군장을 둔 아래쪽으로 잠시 내려갔다. 담배 한 갑을 찾아 다시 나무로 돌아온 순간, 나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불과 몇 초 전까지 내 등이 닿아있던 나무 몸통에 주먹만 한 구멍들이 수십 개 뚫려 있었다. 확실한 건, 내가 담배를 찾으러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면 지금 내 등판은 저 나무처럼 너덜너덜한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었을 거란 사실이었다.
그 순간, 내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 건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나는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었다. 눈물이 핀 돌 정도로 웃겼다. 방금 전까지 내가 기댔던 자리가 걸레짝이 되었는데, 그게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농담처럼 느껴졌다. 나는 동료들을 불러 모아 나무 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으며 자랑을 해댔다. 죽음이 나를 놓치고 헛발질했다는 사실에 대한 조소였다. 나는 이제 사람이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춤을 추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하고도 슬픈 미친 사냥꾼이었다.
어제의 행운은 독이 되어 돌아왔다. 소나무를 벌집으로 만들고도 나를 놓쳤던 적군들의 솜씨를 비웃으며, 나는 평소보다 대담하게 움직였다. 비행기가 던지고 간 보급 상자들은 적의 사선(死線) 깊숙이 박혀 있었다. 예전 같으면 뱀처럼 바닥을 기었을 길을, 나는 죽음조차 나를 피해 간다는 오만함에 사로잡혀 허리를 펴고 걸었다.
무거운 박격포탄 궤짝을 등에 지고 비탈을 내려올 때였다.
"틱-"
미미한 감각이었다. 바늘 끝으로 손등을 살짝 찌른 듯한,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통증. 나는 누군가 가시덤불로 내 손을 건드린 줄로만 알았다. 죽음이 이토록 가볍게 찾아올 리 없다고 믿었으니까. 나는 궤짝의 무게를 견디며 태연하게 능선 아래까지 내려와 짐을 던져놓았다.
그리고 내 오른손을 보았다.
"......!"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바늘에 찔린 것 같던 손은 온데간데없었다. 손등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져, 마치 너덜너덜한 걸레짝처럼 변해 있었다. 뼈마디는 으스러져 하얗게 드러났고, 찢긴 살점 사이로 검붉은 피가 울컥거리며 쏟아졌다. 내 오만한 계산기가 단 한 번의 '틱' 소리에 박살 나버린 순간이었다.
더 끔찍한 건 그 상처에 놈들이 묻혀놓은 인분이었다. 불결한 전쟁의 독기가 내 혈관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불과 이틀 만에 손은 보랏빛으로 부풀었고, 사흘째에는 시체 썩는 악취가 내 코끝을 마비시켰다.
항생제도 의사도 없는 산등성이에서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대로 두면 독이 팔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멈출 것이었다. 나는 보급창고에서 훔쳐온 무거운 식칼을 꺼냈다. 장부를 자르던 그 서늘한 칼날이 이제 내 육신을 향했다.
나는 대마 잎을 입안 가득 씹어 삼키며 통증을 억눌렀고, 칼끝을 불에 달구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칼날은 내 오만함에 대한 처형대였다.
"끄으윽...!"
비명은 이빨 사이로 짓눌려 신음이 되었다. 너무 세게 문 어금니가 빠득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달궈진 칼날이 썩은 살을 가르고 뼈마디를 분리할 때, 단백질이 타는 비릿한 연기가 내 코끝을 찔렀다. 새끼와 약지를 제외한 나머지 세 손가락이 흙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손가락은 죽은 살덩이에 불과했다. 나는 내 손으로 사냥꾼으로서의 수명을 끊어냈다. 상부는 나를 다시 후방인 경주로 배치했다. "가서 뒤에서 얼씬거리는 잔당들이나 잡아."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는 멀게만 들렸다.
나는 맞지도 않는 소총을 왼손으로 어색하게 들고 경주의 산골을 유령처럼 떠돌았다. 결국 적군에게 붙잡혀 개머리판으로 안면을 강타당했을 때, 나는 오히려 안도했다. 놈들은 피떡이 된 나를 죽었다고 판단해 계단식 논바닥 구렁창에 쓰레기처럼 던져버렸다. 구렁창의 비릿한 물을 삼키며 의식을 놓는 순간, 나는 비로소 그 지독했던 사냥꾼의 장부에서 완전히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