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_5화

왼손의 장부, 잿더미에 핀 집착

by 돈미새

포마드 냄새보다 진한 돈의 냄새를 맡았다. 일본 유학파라는 사내가 내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코가 휘어질 듯한 기름 냄새를 풍기며 낮게 읊조렸다.

싸리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한 달 동안 부대 창고의 밑바닥을 긁어 날랐던 미군용 담요며 설탕 포대들이 마당 한구석에 산처럼 쌓인 채 썩어가고 있었다. 빗물에 젖어 눅눅해진 담요에서는 군대 막사의 쩐내가 났다. 그 완고한 문 앞에서 나는 차갑게 식은 공기를 허파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때 깨달았다. 세상은 총알의 직선적인 궤적보다 훨씬 더 비릿하고 정교한 ‘자격’이라는 잣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손가락 세 마디가 도려내진 병신 군인, 내일이면 다시 전장의 고깃덩어리로 던져질지 모르는 사내에게 금쪽같은 딸을 내어줄 부모는 이 천지에 없었다.


내가 목숨 걸고 훔쳐온 것들은 그들에게 사랑의 증표가 아니라, 부정한 도둑놈의 장물에 불과했다. 나는 그 닫힌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정적을 씹으며 발길을 돌렸다.



부대로 돌아가는 트럭 위에서 나는 내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뭉툭하게 잘려 나간 검은 흉터, 그 기괴한 단면이 조롱하듯 나를 응시했다. 무능력은 죽음보다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나는 이미 병장이었으나, 손가락을 잃은 병장은 부대 내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 취급을 받았다.


남들이 코를 골며 잠든 밤, 나는 야전 천막 구석에서 호롱불을 켰다. 기름 타는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나는 왼손으로 연필을 쥐었다. 처음엔 쥐는 법조차 서툴러 종이를 찢어발기기 일쑤였고, 손등에는 쥐가 나 비틀렸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삐뚤빼뚤하게 시작된 글자가 점점 칼날처럼 날을 세워갈수록 내 속의 독기도 차올랐다. 소총 견착도 왼손으로 다시 배웠다. 반동을 이기지 못해 왼쪽 어깨가 피멍으로 시커멓게 죽어 나갔지만, 나는 기어코 왼손잡이 사수의 자격을 쟁취했다.


"김 병장, 자네 진짜 독종이군.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소대장의 비아냥이 경외 섞인 두려움으로 변할 즈음, 나는 경주 후방의 기이한 생태계 속으로 파고들었다. 당시 경주 거리에는 전선을 피해 내려온 소위 ‘백’ 좋은 자들과 일본에서 돌아온 유학파 출신의 모던 보이들이 들끓었다. 그들은 빳빳하게 다려진 양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지만, 그들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풍기는 번들거리는 포마드 기름 냄새는 지독하게 역겨웠다. 전선의 썩은 살점 냄새보다 더 기분 나쁜 인공적인 단내. 하지만 그 매끄러운 머리카락 아래 숨겨진 그들의 눈은, 내가 쥐고 있는 군수물자에 대한 비열한 갈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글자 너머의 생존법을 배웠다. 포마드 냄새보다 진한 돈의 냄새를 맡았다. 일본 유학파라는 사내가 내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코가 휘어질 듯한 기름 냄새를 풍기며 낮게 읊조렸다.


"김 병장, 전쟁은 조만간 끝날 걸세. 그럼 총을 든 자들의 시대는 가고, 장부를 든 자들의 시대가 오겠지. 자네처럼 보급의 목줄을 쥐고 있는 놈이 진짜 사냥꾼이 되는 거야."


그 말은 내 머릿속을 벼락처럼 때렸다. 나는 더 이상 적군의 사살 숫자에 목매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을 뺏는 대가로 계급장을 달던 시대는 내 세 손가락과 함께 잘려 나갔다. 이제 내 장부는 군수물자의 흐름과 암시장의 시세,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매수하는 숫자로 가득 찼다. 보급병이라는 직위는 내 새로운 총구가 되었다. 부대에서 나오는 통조림과 휘발유를 빼돌려 현금화했고, 그 돈으로 상부의 장부를 채웠다.


진급은 피 냄새 대신 기름진 뒷돈의 냄새를 타고 왔다. 나는 하사를 지나 중사까지 거침없이 기어올랐다. 내 어깨의 계급장은 내가 쏜 총알의 숫자가 아니라, 내가 상부의 금고에 채워준 액수였다. 나는 이제 전장의 사냥꾼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거대한 시체를 뜯어먹는 회계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중사 시절, 나는 가슴 한구석에 곪아 터진 부채감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그 산골 마을을 찾았다. 이제는 어엿한 간부의 계급장을 달고, 트럭 가득 미제 물건들을 실은 채였다. "이제는 나를 무시하지 못하겠지."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그러나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설레는 재회가 아니라, 소름 돋는 침묵이었다.


초가집은 없었다. 지붕은 주저앉아 시커멓게 썩어 문드러졌고, 내가 보급품을 쌓아두었던 마당에는 사람 키만큼 자란 잡초들이 유령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적군의 기습이었는지, 아니면 잔당 소탕을 미명으로 들이닥친 우리 군의 짓이었는지 알 길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내가 처음으로 사람다운 감정을 느꼈던 그 공간이 이제는 뼛조각조차 찾을 수 없는 비릿한 폐허로 변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나는 텅 빈 마당 한복판에 서서 잘려 나간 내 손가락 마디를 만져보았다. 이곳에 바쳤던 물건들, 서툰 진심, 그리고 그녀를 위해 살아남으려 했던 그 간절함은 모두 어디로 증발했는가. 전쟁은 내가 가졌던 유일한 온기마저 장부에서 깨끗이 도려내 버렸다. 나는 그날 이후 다시는 ‘사랑’이나 ‘연민’ 같은 단어를 내 인생의 계산기에 넣지 않았다.


'군인으로 살 수 없다면,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폐허를 등지고 돌아섰다. 보급품을 팔고 사며 익힌 돈의 냄새, 그리고 인간들의 비열한 욕망. 나는 잘려 나간 세 손가락의 빈자리에 ‘악바리’라는 지독한 독기를 채우고 또 채웠다. 장부의 숫자는 이제 사살 인원이 아니라, 내가 쥐어야 할 권력과 재력의 수치로 바뀌어갔다. 가끔 밤바람이 서늘해지면 그 초가집 마당에서 나를 바라보던 소녀의 눈망울이 떠올랐지만, 나는 강박적으로 장부를 펼쳐 숫자를 써 내려갔다. 순수는 사치였고, 기억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일 뿐이었다.


나는 이제 왼손으로 세상을 쥐는 법을 안다. 사냥꾼은 죽지 않았다. 다만 총구를 짐승이 아닌, ‘성공’이라는 보이지 않는 목표물로 돌렸을 뿐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왼손으로 장부를 덮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두고 봐라. 이 손가락 세 개 값, 반드시 이 세상에서 다 받아낼 테니까."


내 오른손의 흉터는 이제 부끄러움이 아니라, 내가 이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갈아온 가장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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