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사냥
낙동강 전선은 비릿한 물냄새와 함께 요동쳤다.
인천으로 상륙한 아군이 적의 허리를 끊어놓았다는 소문은 전령의 입을 타고 참호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북한군의 본대는 보급로가 잘리기 전 서둘러 북으로 발길을 돌렸고, 고개 마루를 지키던 우리는 처음으로 참호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퇴로를 놓친 적들은 산속으로 기어들었다. 놈들은 도망치지 못한 짐승처럼 숲 속 깊은 곳에 웅크린 채 마지막 발악을 준비하고 있었다.
“산 전체를 훑는다. 한 놈도 남기지 마라.”
9월의 낮은 여전히 뜨거웠다. 습기를 머금은 숲은 거대한 찜통 같았고, 땀에 젖은 군복은 살점을 짓무르게 했다. 하지만 해만 지면 숲은 돌변했다. 대지는 무섭게 식었고, 밤안개는 뼈마디가 시릴 정도의 냉기를 품고 폐부로 파고들었다. 나는 그 극단적인 온도 차 속에서 무미건조하게 산등성이를 탔다.
나는 이 혼란 속에서도 셈을 멈추지 않았다. 9월의 온도차만큼이나 명확한 숫자들이 내 장부를 채워갔다. 낙동강에서 언양을 거치며 쌓은 사살 기록과 보급품 관리 능력 덕에, 나는 학도병 중 유일하게 일병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내게 적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빨리 찾아내서 지워야 할 할당량’이자, 내 장부의 결손을 메울 숫자일 뿐이었다.
수풀을 헤칠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바위 틈새에서 웅크린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 퇴로를 잃고 낙오된 적병이었다. 녀석의 군복은 넝마가 되어 있었고, 퀭한 눈에는 살의 대신 지독한 허기만이 고여 있었다. 나를 본 녀석이 떨리는 손으로 소총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내 손가락이 더 빨랐다. 아니, 망설임이 없었다.
‘탕-!’
총성은 숲의 습한 공기를 찢고 금세 잦아들었다. 고꾸라지는 적의 육체를 보며 나는 입안에 고인 텁텁한 침을 삼켰다. 녀석이 죽어가는 꼴을 보며 든 생각은 '불쌍하다'가 아니라, '이제 이 구역은 끝났다'는 안도뿐이었다.
“김 일병! 거기 있나?”
멀리서 김 병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쓰러진 적의 품을 뒤져 먹을 것이나 쓸만한 물건이 있는지 살피다 대답했다.
“하나 더 지웠습니다.”
내 목소리는 스스로가 듣기에도 낯설 만큼 건조했다. 사람을 죽였다는 표현 대신 ‘지웠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김 병장은 내 곁으로 다가와 시체를 쓱 훑고는 내 눈치를 살폈다.
“너, 이제 아주 사냥꾼 다 됐구나. 일병 계급장 단 이유가 있어.”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사냥꾼이든 짐승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이 산속을 헤매는 짓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본대가 북으로 도망쳤다면, 이제 우리도 북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집을 지나치게 될지, 아니면 더 먼 곳으로 가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살아계실 거라는 희망을 억지로 눌러 죽였다. 인천이 뚫리고 우리가 반격을 시작했다는 건, 그만큼 이 땅이 더 처참하게 타버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살아있다면 겪어야 했을 고초를 상상하느니, 차라리 이미 흙이 되었다고 믿는 편이 내 사격을 더 정교하게 만들었다.
희망은 무거웠고, 단념은 가벼웠다. 나는 가벼운 쪽을 택했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셨다면 나는 아들이 아닌 병사로서만 존재하면 되니까. 그 비겁한 평온함이 나를 지탱했다.
9월의 태양이 산등성이 너머로 지고 있었다. 숲에 다시 어둠이 깔리면 소름 끼치는 추위가 찾아올 것이다. 나는 다음 사냥감을 찾기 위해 다시 수풀을 헤쳤다. 내 발등을 타고 오르는 차가운 안개가 마치 내 마음이 얼어붙는 속도와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유령처럼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