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물드는 것이 아니라, 깊게 쌓이는 중이다

라캉의 『에크리』를 읽고

by 돈미새

[독서 노트] 검게 물드는 것이 아니라, 깊게 쌓이는 중이다

: 라캉의 『에크리』를 읽고


라캉을 처음 마주한 건 스물넷의 겨울이었다. 당시 읽었던 『주체와 언어와 향유 사이에서』라는 책 속의 그는 난해했고, 오만했으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았다. 문장은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나는 그 길을 헤매다 결국 입구 근처에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해하지 못한 선율이 귓가에 맴돌듯, 그의 불친절한 단어들은 마음 한구석에 생경한 흔적을 남겼다.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흘렀다. 아이를 품에 안아 키우고, 삶의 밀도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묵직해진 지금, 나는 다시 『에크리』를 펼쳤다. 그리고 「거울 단계」를 읽는 순간, 예전에는 활자에 불과했던 문장들이 돌연 살아 움직이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는 머리가 아니라, 삶이 먼저 반응했다.




거울 속에서 시작된 최초의 오해


라캉은 아이가 거울 앞에 서서 처음으로 “저게 나야”라고 외치는 환희의 순간을 포착한다. 자기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는 아이가, 거울 속에 비친 완결된 형상을 보고 그것을 '자아'라고 믿어버리는 장면.


하지만 라캉은 차갑게 덧붙인다. 그 이미지는 진짜 당신이 아니라고. 그것은 외부에서 온 박제된 형태일 뿐이며, 우리는 그 ‘오해’를 시작으로 평생 자신을 규정하며 살아간다고 말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책장을 덮고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철학적 사유 이전에, 매일 아침 마주하는 내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말랑한 마음을 가두는 단단한 언어라는 그릇

나는 아이들에게 글자를 늦게 가르치고 싶었다. 아이들의 마음은 굳지 않은 점토처럼 말랑하다. 이름 붙지 않은 감정들이 구름처럼 떠다니고, 설명되지 않아도 존재하는 무한한 세계가 그 안에 있다.


그러나 언어가 개입하는 순간, 세계는 가차 없이 규정된다. “사랑은 이런 거야”, “착한 아이는 이래야 해.” 그런 문장들이 쌓일수록 아이의 자유로운 상상은 단어라는 좁은 그릇 안에 담긴다. 형태를 얻는 대신, 그 외의 수많은 가능성은 거세된다. 라캉이 말한 거울 단계가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언어는 아이에게 또 하나의 거울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정답 같은 이미지들이 아이의 말랑한 본질을 조금씩 굳혀가는 과정.


결국 가르쳐야만 했다. 세상은 이미 타인의 언어로 가득 찬 숲이니까. 다만 나는 바랐다. 그 단단한 언어의 틀 속으로 들어가더라도, 아이가 가진 본연의 색깔이 완전히 휘발되지는 않기를.




식탁 위에서 그린 호랑이, 그리고 검은색의 마음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텔레비전만 보고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막내를 유치원에 보냈다. 이후에 4학년, 2학년 두 딸아이와 함께 문구점에 들러 그림 재료들을 샀다. 식탁 위에 신문지를 깔고 아이들과 나란히 앉아 각자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 그 다정한 풍경 속에서 나는 호랑이를 그렸다.


처음 붓을 들었을 때 내 호랑이는 선명한 원색이었다. 단순했고, 투명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배경 삼아 붓질을 더할수록 호랑이의 색은 자꾸만 변해갔다. 타인의 서늘한 평가, 뼈아픈 실패의 기억, 돈이라는 냉정한 현실, 그리고 관계 속에서 얻은 생채기들. 그 모든 경험이 물감처럼 덧칠될수록 호랑이의 몸은 점점 어두워졌다. 어느 순간 문득 보니, 내가 그린 호랑이는 화려한 빛을 잃고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묵직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라캉의 시선으로 본다면, 나는 외부의 시선과 타자의 언어에 포획되어 본래의 나를 잃어버린 존재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만든 형태에 나를 끼워 맞추며 변색해 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변화를 '상실'이라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차라리 어떤 ‘밀도’에 가까웠다.




물드는 것이 아니라, 축적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종종 말하곤 한다. “우리는 모두 선명한 원색으로 태어나지만, 세상을 살며 주변의 색에 물들어갑니다. 하지만 그 변화 과정 자체가 바로 ‘나’입니다.”


라캉은 주체가 타자의 언어에 의해 분열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분열조차 삶의 훈장이라 믿는다. 상처가 쌓여 검게 변하는 것은 속이 텅 비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담아냈기에 도달한 깊이다.


내가 그린 호랑이처럼, 배경은 여전히 시끄러운 원색들로 명멸하지만 중심에 선 호랑이는 그 모든 소음을 흡수해 검은 밀도로 응축되어 있다. 그리고 오직 눈빛만은 날카롭게 빛난다. 수많은 외부의 색을 통과하고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은 채 남겨진 유일한 '나'.




거울 앞에서 견뎌온 시간의 무게

스물넷의 나는 라캉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아직 삶을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를 키우며 나를 지우고, 책임을 지고, 무너진 자리를 다시 메우는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타자의 언어로 만들어지는 나”라는 고백은 그저 허무한 이론에 불과했을 테니까.


우리는 평생 거울 속 이미지를 나라고 믿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거울 앞에 서서 수많은 색의 물감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그 시간을 견디며 밀도를 만들어온 주체만큼은 분명한 실재다.

거울 속의 나는 허상일지라도, 그 거울 앞에 서서 오늘을 버텨낸 나의 어둠은 누구보다 정직한 나의 것이다.




풍경 속에서:In a Landscape_베르트랑 샤메유


아이들을 겨우 재우고 난 뒤 찾아오는 이 고요한 밤이 좋다. 나에게는 이 시간이 유일한 놀이터이자 숨구멍이다. 좋아하는 만년필을 꺼내 들고, 낡은 노트 위에 잉크를 꾹꾹 눌러 담으며 혼자 긁적거리는 것이 내 오랜 취미였다.


사실 누군가에게 내 글을 보여준다는 것은 여전히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적은 글들도 오랫동안 서랍 속에만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끄적이는 내용을 거울 밖으로 꺼내고 싶어졌다.


거창한 철학도, 대단한 작가의 글도 아니다. 그저 밤마다 만년필 끝에서 피어오른 설익은 생각들을 용기 내어 처음으로 블로그에 옮겨 본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 기록은 나를 포획한 세상의 언어들 사이에서, 나만의 작은 빛깔을 잃지 않으려 애쓴 지극히 개인적인 저항의 흔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