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의 수의(壽衣)를 벗고 야성을 회복하라
아내와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래의 글은 아내와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정리한 글이다.
뉴욕의 마천루는 비웃음의 상징이었다. 대륙 끝 유럽의 귀족들은 그 노골적인 높이를 보며 ‘근본 없는 졸부의 객기’라 치부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 비웃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더 높이, 더 견고하게 건물을 올렸다. 그곳엔 화려한 문장(紋章)도, 유령이 나오는 낡은 성벽도 없었다. 오직 실리와 효율, 내일을 향한 무서운 속도만이 존재했다. 그것이 우리가 질투했던 미국의 당당한 ‘미학’이었다.
구걸하는 귀족과 기죽은 거인
하지만 지금의 미국은 기묘하다. 국방과 경제를 미국에 의존하며 과거의 화려했던 명품 옷으로 간신히 치부를 가린 채, 노령 연금과 용돈을 구걸하는 유럽의 ‘고고한 척’에 미국이 기가 죽어 있다. 현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꽃피운 국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러한 현학적인 허세는 문화 곳곳에 침투해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가 남긴 잔상이 그 예다. 물리학을 처절하게 파고든 것도, 그렇다고 지극히 문학적인 울림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로 포장하며 지적 우월감을 즐기는 석·박사들의 허세를 보는 듯했다. 과거 전 세계가 미국의 3류 코미디와 할리우드에 환호했던 이유는 그것이 유치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욕망에 솔직하고 당당했기 때문이다. 재미없어 망한 영화를 두고 “프랑스 감독이 만들었나 보다”라며 자위하는 고고한 빈 껍데기를 동경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졸부’라는 이름의 훈장
우리는 흔히 졸부를 비하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졸부’가 아닌 부자가 어디 있는가. 지금의 재벌들 역시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폐허 속에서 모든 것을 감내하고 일어선 생존자들이다. 과거 할아버지 때는 잘살았는데 아버지가 가산을 탕진했다며 늙은 노인이 내뱉는 한탄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무능력하게 과거를 파먹으며 세상 탓만 하는 영혼은 가련할 뿐, 결코 우러러볼 대상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당당했다. 그것이 대중문화든, 식민 지배의 잔재든 상관없었다. 우리는 그것을 비굴하게 거부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다. 우리의 식으로 삼키고, 우리의 것으로 소화하며 시대의 흐름에 정직하게 대응했다. 나의 과거와 타인의 강요 앞에 거짓으로 응대하지 않았던 그 ‘야성’이 우리를 오늘에 있게 했다.
질문을 남기며: 주도적인 삶을 위하여
미국과 대한민국이 닮지 말아야 할 단 하나의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한심하고 안타까운 영혼’들이다.
실리와 효율은 천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의 문법이자 가장 현대적인 미학이다. 낡은 비단옷을 걸치고 고고한 척 앉아 구걸하는 노인에게서 배울 것은 없다. 미국이 다시 미국스러워지는 길은, 그리고 우리가 우리다워지는 길은 단순하다. 허세라는 수의(壽衣)를 벗어던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선 자의 거친 손마디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지금 몸에 맞지 않는 남의 옷을 입고 고결한 척 죽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먼지투성이의 작업복을 입고 내일을 향해 당당히 걷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