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쓰기 취미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애 듣겠다."라며 어른들끼리 속삭이던 이야기를 못 들은 척했고, 낮은 볼륨의 원인이 내가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부주의라는 사실도 알았다. 사춘기의 시작은 존재의 이유와 죽음에 관한 의문 때문에 발작에 가까운 공포를 경험했다. 어울리던 그룹은 내가 없으면 모일 수 없는 구성원으로 가득했고, 남학생 최악의 난이도라는 여자아이들의 연애상담도 능숙했다.
"너는 뭔가 좀 생각이 있는 것 같아."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였다. 또래 아이들의 갈등과 고민을 짚어내는 능력은 확실히 있었다. 반면 기대에 부응하려 안절부절못하던 두려움도 공존했다. 어쨌든 그 양면성조차도 '사색'의 힘이었다. "쟤는 왜 그랬을까?", "나는 왜 이러는 걸까?" 끊임없는 사색이 정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남들이 떠올리지 못한 어딘가 정도는 보장했다.
나는 여전히 사색을 즐긴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나. 사색만으로 구현되는 통찰은 스무 살 언저리가 한계였다. 보고 듣는 총량이 고만고만한 시절까지는 생각이 많은 아이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성인이 되자 또래 아이들은 바뀌기 시작했다. 생각이 짧던 아이가 생각이 많아질 수는 있어도, 역주행은 흔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각자의 가치관을 찾아갔고 지식과 경험까지 쌓이자 내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통찰의 3요소는 사색, 지식, 경험이다. 선천적인 사색이 만들어낸 통찰의 수명이 짧은 이유는 지식과 경험의 부재다. 답이 존재한다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답을 찾기 위해 사색한다. 한 번의 경험으로 깨우칠 수 있는 의문조차 몇 날 며칠을 사색한다. 지식과 경험이 선행되지 않는 사색은 기억의 반복일 뿐이다.
지식과 경험을 멀리하고 사색 빌런이 된 이유는 '산신령 이론'을 맹신한 탓이 크다. 생각하는 사람. 득도. 깨우침. 명상과 묵언수행. 세상을 이해하는 핵심이 사색이라는 가르침이 오히려 독이 된 경우다. 사색이 통찰의 본질은 맞지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했다. 공급 없는 사색은 뫼비우스띠로 작동할 뿐 상승하지 못한다. 지금 당장 지리산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명상을 하면 통찰력이 생길까?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여러 가지 정신수양은 현대인에게 부족한 사색을 강조하는 콘텐츠다. 스님을 명상과 묵언수행을 반복하는 아침형 인간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업무도 보고 공부도 한다.
20대 중반까지는 다양한 경험을 했다. 고등학교 중퇴와 대학교 중퇴. 시청 공익 요원 2년과 해외 연수 1년까지. 평범하지 않은 경험은 사색의 원동력이 되었고,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통찰력을 발휘하는 듯했다. 그 이상 상승하지 못했던 이유는 지식의 부재였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남들처럼 토익도 했고 일어와 프로그래밍 공부도 했다. 그럼에도 지식의 부재였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통찰에서 말하는 지식의 뉘앙스는 '스펙'보다는 '지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문제집 풀이가 아닌 '독서'를 의미했다.
다음으로 통찰의 한계에 부딪치는 시작점은 경험의 결핍이다. 통찰에 필요한 경험은 '자극'이 있어야 한다. 20대 후반부터 내가 했던 경험이라고는 병원, 유튜브, 산책정도가 전부다. 그것들이 의미 없는 경험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정신과를 방문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큰 자극일 것이다. 유튜브와 산책조차도 처음에는 사색으로 이어지는 경험이었다. 문제는 반복이다. 신입사원의 3개월과 10년 차 3개월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직업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자극은 감소하기 마련이다. 경력은 계속해서 쌓이지만 자극의 대부분은 익숙해지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의 30대는 자극도 없고 독서도 없었다. 사색만 남겨진 통찰은 10대 수준으로 회귀했다. 병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경험의 결핍은 예고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늦게라도 독서를 시작했어야 했다. 글 제목의 답이 나왔다. 통찰은 '독서 없이' 사색과 경험만 믿던 20대에 정체되었고, '독서가 없는데' 자극까지 사라져 버린 30대에 박살이 난 것이다.
세계일주를 하고 있다면 필요한 것은 독서가 아닌 사색이다. 통찰의 3요소로 사색, 지식(독서), 경험(자극)을 꼽았지만 믿음, 소망, 사랑처럼 공평하지는 않다. 사색이 엔진이라면 독서와 자극은 연료다. 자극이 차고 넘치면 독서를 하지 않아도 통찰은 상승할 수 있고, 방구석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책 수만 권을 읽는다면 혜안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 천재거나 천운을 타고난 게 아니라면, 연료는 독서와 자극의 혼합일 수밖에 없다.
지식과 경험을 연료로 묶은 이유는 본질은 똑같기 때문이다. 책은 결국 누군가의 지식과 경험이고, 그것을 읽는 행위가 경험이자 지식이 되기 때문이다. 자극보다 독서를 메인으로 두는 근거는 자극은 수동적이고 강제적인 경우가 많지만 독서는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자극이 넘치는 환경에 놓였다면 독서를 줄이고, 반복된 일상으로 자극이 부족하면 독서를 늘리면 된다.
현재의 나를 독서와 자극이 없다고 표현했지만 완벽하게 0은 아니다. 자신의 글을 읽는 것도 미량의 독서고, 잠깐씩 브런치를 둘러보는 시간도 독서다. 고립된 일상이라도 하루하루가 똑같을 수는 없다. 사소한 변화에서 자극을 찾으려고 애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부족한 연료. 그래도 엔진은 돌아간다. 통찰이 박살 난 것이지 사색이 박살 나지는 않았다.
사색이라도 무사한 이유는 '글쓰기'때문이다. 지식과 경험을 쌓는 방법은 너무나도 많지만 사색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창의적 업무? 명상? 웬만하면 단언하지 않는데 글쓰기만큼 사색이 필요한 작업은 없다. 독서를 장려하는 글처럼 돼버렸지만 글쓰기를 더 추천하고 싶다. 엔진은 연료가 부족하고 불순물이 섞여도 돌아가지만, 고장 나면 고급 휘발유를 때려 넣어도 무쓸모다.
지식(독서)과 경험(자극)을 겸비한 통찰의 상승은 사색(엔진)이 작동한다는 전제가 우선이다. 독서와 글쓰기 중 반드시 하나만 고르라면 망설이지 않고 글쓰기를 택하겠지만, 마침 글의 내용이 "현재 나의 가장 큰 결핍이 독서구나~!"라는 사색을 서술한 것일 뿐이다. 경험이 부족하다면 글쓰기를 해보자. 지식의 결핍을 느꼈다면 글쓰기를 해보자. 부족한 글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글을 써보자. 통찰은 없어도 부끄러울 이유가 없다. 하지만 사색이 없으면 언젠가는 부끄러움을 마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