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덕
지인 중 한 명이 "어떻게 이 단어를 모를 수가 있어?"라며 놀라워했다. 낮은 어휘력을 부끄러워해야 할지 배움에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상 회화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했는데, 어쨌든 '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음미하거나 생각한다'는 의미다. 우울을 겪는 환자들이 과거를 곱씹는 행위도 일종의 반추다. 이 단어가 등장한 책은 서른 권 중 세 권이었다.
익숙한 어휘지만 정확한 사용법을 모르겠다. 알려진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감성적인 지각처럼 추리, 연상, 판단 등의 사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즉 어떻게 지식이 취득되는가를 이해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경험과 지식의 순간적인 통찰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발견이 대표적인 직관력이다. 여기서 끝났다면 헷갈리지 않았을 것이다. MBTI에서 N(직관)과 S(감각)를 구분하는 설명이 명확하지 않다. N에서 말하는 직관에는 '직감'이 포함되는데, 직감을 설명하는 다른 글에는 직관과 직감을 명확히 나눈다. 게다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직관력'이라는 어휘는 S(감각)의 '오감'에 가깝다.
"여러분, 딱 보시면 직관적으로 아시겠죠?"
"직관적인 디자인!"
"음악방송은 직관이 근본이지!"
타인의 직관을 추론할 수 있을까? 전문성을 배제한 상식영역의 직관은 공유될 수 있지만, 예문의 뉘앙스는 오감의 '시각'에 가깝다. 또 "스포츠 경기나 콘서트를 직접 본다."라는 신조어 '직관'을 혼용하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직관적인 직관."이라는 표현도 가능하다. 직관이라는 개념을 독서로 익혔다면 혼란스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막연하게 '착각'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합리화'에 가까웠다. 더 깊이 들어가면 도덕적 괴리감을 좁히려는 생존본능이다. 대표적으로 '거짓말 실험'이 있다. A그룹 피험자들에게 1달러를 준다. B그룹에게는 20달러는 준다. 두 그룹 모두 거짓말을 하도록 부탁한다. A그룹은 B그룹보다 거짓말을 열심히 변호했다. "고작 1달러를 받고 거짓말을 했다."라는 도덕적 괴리감 때문이다. 반면 B그룹은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했다. 인지부조화의 핵심은 이미 저질러버린 행위(결과)의 재구성이다.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른 현실을 마주하는 감정 - 정상적인 사람이 고작 1달러로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 은 인지부조화를 유발할 수 있지만, 착시나 초자연적 현상을 목격하는 심리상태는 인지부조화가 아니다.
프로이트와 융, 다윈, 마틴 루서 킹, 유대인, 2차 대전, 인종차별,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표본으로써 서른 권은 부족하지만 반복되는 빈도를 보면 추측은 가능하다. 새삼 깨달은 것은 인종차별의 농도였다. "인종차별이 없으면 미국 소설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우리나라 20세기 초반을 떠올리면 일본은 빠질 수 없다. 그 시절이 흑인이 합법적으로 차별을 받은 시기와 동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늘날의 인종차별이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우스갯소리로 스티븐 킹과 스티븐 호킹이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했는데 마틴 루터와 마틴 루터 킹이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은 정말로 몰랐다. 마틴의 표기가 '마르틴'이거나 루터가 '루서'라는 외래어 표기법은 덮어두고, 이런 면은 독서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같은 분야 책 50권을 읽으면 전문가에 가까운 지식을 얻는다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럴까?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내가 읽은 심리학 책은 10권도 안 되지만 중복되는 실험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실험은 다섯 번도 넘게 언급되었고, 프로이트와 융, 찰스 다윈은 안 나오는 책이 없을 정도다. 같은 분야 책 40권 정도부터는 아는 내용이 더 많을 수도 있겠다.
급성장한 경제와 과학은 합리성, 효율, 이윤을 앞세워 철학을 외면했다. 그로 인한 결과는 우리가 겪고 있는 현대사회다. 편의성은 늘었지만 행복은 감소하고 부의 양극화와 혐오가 만연하다. 때문에 철학의 최신 경향은 행복증진에 있고, 현대인에게 결여된 도덕을 지적하며 신성함과 공동체를 강조하는 시각이 생겨났다. 자본주의는 공리주의(최대이득/최소손실)와 자유지상주의(최소정부/자유거래)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신성함과 공동체로부터 도덕과 정의를 실현하자는 의견은 과거 회귀로 보일 수 있다. 이상주의라는 비판도 있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변화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 없다. "보수는 과거에 진보였다."라는 이론은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시사한다.
철학을 접할수록 "정치는 철학자가 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동의하고 싶어 진다. 얼마 전까지 나는 정치는 전문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법조인, 공무원, 경제전문가를 리더로 선택한 처참한 엔딩을 목격했다.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상식인 세상이다. 우울과 불안을 겪는 환자들은 특정 소득층에 편중되지 않는다. 정책으로 행복을 증진시키자는 발상은 정신 의학이 정신질환 치료에만 몰두한 근시안적 역사와 닮아있다. 의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암 발병은 상승했다. 정신질환과 암을 정복하더라도 모두가 한 번씩 고통스럽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새로운 병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부동산과 물가 상승 문제를 해결하면 정말 행복해질까?
북유럽 국가의 높은 행복도가 많은 세금으로 구현한 복지 덕분이라고 말하는데, 핵심은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다. 그들은 종교, 도덕, 정의, 독서, 토론, 철학을 보전했다. 우리도 유교나 동양 철학, 불교, 공동체 문화가 있었지만 뿌리체 뽑혔거나 새로운 것이 대체했다. 이는 도덕 정체성이 혼란스럽다는 의미다. 어쨌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의 재분배' 실천이 아니다. 부의 재분배를 해석하는 시각을 말하는 것이다. 북유럽을 공산주의에 가깝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명품(사치품)을 과시하는 행위는 사회적 계급 차별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의사와 변호사가 되기 위해 사교육에 투자하는 행위도 직업 계급의 존재를 공통으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만약 공동체 구성원이 부를 과시하지 않고 직업에 편견이 없다면, 명품 소비와 사교육비는 다른 형태로 환원될 것이다. 실제로 행복도와 GDP가 모두 높은 국가는 부를 과시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경우가 많다. 명품에 더 많은 세금을 붙이고 의사와 변호사가 될 수 있는 접근성을 낮추는 정책을 도입하면 두 가지는 완화될 수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자식에게 "공부 못하면 저 경비원 아저씨 처럼 된다~!"라고 말하는 부모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정책은 "너희 집 몇 평이니?"라고 묻는 아이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것을 바로잡는 방법이 철학을 활용한 도덕과 정의에 관한 학습이고, 나아가 독서와 글쓰기다. 하지만 오늘자 뉴스 사교육비 역대 최고 경신이란다.
최근 독서 흐름은 사회적 자본, 사회적 고립, 도덕, 정의, 공동체 신뢰가 주류다. "왜 출산율이 낮을까?"라는 의문은 돌고 돌아 '도덕'이라는 경유지에 서있다. 지금까지 결론은 절망의 연속이다. 교육은 개선될 여지가 없다. 정직하면 손해라는 명언은 당분간 유효할 것이 틀림없다. 법만 지키면 된다는 도덕 범위도 견고하다. 반칙도 실력이라는 가치관이 정당성을 얻고 있다. 악덕 기업을 불매 운동으로 잠재우지 못하는 공동체. 그럼에도 우리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자기 계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더 안타깝게 다가온다. GDP가 생계의 경계선에 있다면 경제성장과 행복을 저울질할 가치는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GDP는 행복대비 너무나 높지 않은가. 어딜 봐도 문제라서 글감이 줄지 않는 것은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