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빛 병균 바다
아래 단어를 순서대로 읽어보자.
1번을 보자. 꽃이 긍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면 우리의 정서는 '긍정'으로 노선을 정한다. 때문에 행복, 햇빛, 희망이라는 단어를 마주해도 멈칫하지 않는다. 2번은 노선만 다를 뿐 원리는 1과 같다. 3번은 어떨까? 햇빛과 병균 사이에서 멈칫한 것은 기분 탓일까? 1번과 4번을 번갈아 읽어보자. 평범한 사람이라면 1번보다 4번을 읽을 때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긍정과 부정의 가치판단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긍정에서 부정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뀌는 시간은 짧지 않다. 선점한 정서가 같은 방향을 미리 결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바른 마음>이라는 도덕 심리학 책에서는 이것을 '정서적 점화'라고 표현했다. 정서적 점화는 0.2초 정도 효과를 보이며, 효과는 이후 약 1초간 지속된다고 쓰여있다. 도덕심리학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글쓰기를 떠올렸다.
리듬감 있는 문장, 이유는 모르겠지만 술술 읽히는 글. 그것들의 핵심은 필력이다. 필력을 세분화하면 독서, 글쓰기, 경험, 재능, 공감, 감수성 등이 있다. 나는 여기에 정서적 점화를 조심스레 포함시켰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정서적 점화를 의식적으로 이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의식적인 결과일 것이다. 어쨌든 글을 잘 쓰는 사람은 4번 같은 단어 배열을 즐겨 쓰지 않는다.
글쓰기에 정서적 점화를 이용하는 능력은 어떻게 얻는 것일까? 재능? 독서? 무의식적으로 발휘되는 능력은 무의식적으로 습득하기 마련이다. 직업병과 습관은 반복이 핵심이다. 필력은 쓰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좋아지는 게 정설이다. 나는 무의식적인 습득을 의식적으로 얻으려고 했다. 물론 의식적 학습이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논술 시험, 맞춤법, 문법, 목차 구성, 서식 등은 어느 정도 결과를 본다. 하지만 그 이상은 무의식을 통해서만 도달한다. 글을 잘 쓰는 편법을 모색할수록 쓰기와 읽기라는 출발점을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