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학살에 연루된 아이히만의 재판 기사를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키워드로 유명하다.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이 당시에는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악의 평범성은 스탠리 밀그렘의 복종실험에도 등장한다. 퀴즈를 틀릴 때마다 상대방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는 실험에서 최대 전기 충격을 가한 피험자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복종실험의 결과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의 차이가 궁금했다.
독서 경력이 짧은 탓일까? 지금까지 읽었던 책중에서 가장 어렵다. 독일어 인물과 지명, 수많은 괄호와 부연설명은 내가 난독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개념과 사건들은 너무 많은 배경지식을 요구했다. 5일 동안 붙들고 있지만 150페이지가 남았다. 솔직히 말하면 책이 읽기 싫어서 글을 쓰고 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다. <종의 기원>과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읽을 때에도 "내가 이걸 왜 읽고 있나..."라며 절규했지만 끝까지 읽기는 했으니까. 조금만 참으면 된다.
책이 어렵다며 투덜거리는 나에게 지인이 했던 말이다. 지인의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해 보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지 마라.
즐겁게 읽을 수준이 되었을 때 읽어라.
즐거운 책만 읽어라.
어렵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내라.
재미만 추구했다면 지금보다 3배는 많은 책을 읽었을 것이다. 나는 왜 자율적인 환경에서 고통스러운 독서를 고집하고 있을까? 지식의 콤플렉스? 자존심? 성취감을 위해서? 다양한 책을 읽고 글쓰기를 잘 쓰고 싶은 욕심도 있다. 쓰려면 읽을 수밖에 없다고 배웠다. 그런데 현재 시점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어느 면에서 보나 최악의 효율을 보여주고 있다. 수준에 맞는 책으로 바꿔 읽어야 맞다. 생각할수록 모순이다.
완독의 만족감은 그 자체로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완독 하지 못한 책은 끊어진 다리와 같다. 물리적으로 읽지 않은 분량은 다른 책과 연결될 수 없으며, 포기하는 행위에 익숙해질 위험이 있다. 이러한 결론은 많은 고민 끝에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언어영역 지문으로 나왔다고 해보자. 완독 하지 않아도 정답을 찾을 수 있다. 더 무서운 점은 완독을 했더라도 틀릴 수 있다. 지식이 목적이라면 서평과 해설을 읽는 편이 효율적이다. 그런데 즐겁지가 않을 것 같았다. 이상을 추구하는 가치관은 현실에서 많은 손실과 후회를 낳았다. 하지만 독서에서까지 현실의 손을 들어주기 싫었다. 고집일 수도 있겠지만, 현실만 추구하는 독서는 '공부'와 다르지 않다며 타협을 보았다.
완독 하지 않는 것도 편독이다. 아무 말 대잔치. 정신승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히 얻는 것이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진작에 포기했다면 이 글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장담하는데 완독하고 나면 미래의 글에서 저 놈의 책을 수 없이 인용할 게 뻔하다. 완독도 안 했는데 언급하는 것은 자존심의 스크래치다. 편독은 독이다! 이렇게까지 말해두었으니 안 읽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의욕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