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덕 범위
얼마 전까지 브런치 글을 하루 평균 30개 정도 읽었다. 나에게는 읽으면 좋아요를 누르는 '규칙'이 있다. 브런치 이용자들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 그중 하나는 좋아요를 받으면 좋아요로 응답하는 것이다. 경험상 30%는 되는 것 같다. 30개의 좋아요를 누르면 어떤 글을 쓰더라도 좋아요 10개가 보장됐다. 사람들의 규칙은 다양했다. 댓글을 받으면 댓글로 응답하는 규칙, 구독을 하면 구독을 해주는 규칙, 상대가 매크로를 사용한다는 의심이 들면 반응하지 않는 규칙, 반드시 대댓글을 달아주는 규칙, 타인의 브런치를 구독하지 않는 규칙도 있었다.
규칙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까? "반칙도 전략."이라는 표현이 거북할 수 있지만 도약의 발판임은 확실하다. 수단이야 어쨌든 증가하는 조회수와 댓글은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댓글이 1개만 달리는 사람보다 3개 달리는 사람이 의욕적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교묘한 반칙과 할리우드 액션으로 팀 승리에 기여한 축구선수 A는 선발로 나설 확률이 높다. B의 실력은 A와 똑같지만 '정직한' 플레이만 고집하여 팀 기여도가 낮았다. A의 선발 출천 횟수가 누적되면 A와 B의 축구실력은 벌어진다. 실전 경험은 연습으로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A는 반칙을 하지 않아도 B보다 축구를 잘하게 된다.
축구선수 A와 B를 브런치에 대입해 보자. 어떤 식으로든 주목을 끌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효과가 있다. 읽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자료조사에 공을 들이고 게을러지지 않는다. 이런 전략으로 작가가 되는 경우를 봤다. 물론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주목만 끌고 노력하지 않는 인간도 있다. 어쨌든 나는 도덕이라는 단어를 떨쳐낼 수 없었다. 도덕을 중요시하는 부류는 권선징악과 정의구현을 꿈꾼다. 묵묵히 정진하면 빛을 본다고 믿는다. 정말 그럴까? 우리가 축구선수 A와 B를 인지하는 시점은 A의 실력이 B보다 높아진 후다. 게다가 A가 더 이상 반칙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
구독자 1만부터 보던 유튜브 채널이 있다. 그 채널은 구독자 10만이 넘어서 안정권에 들어갔다. 꽤나 정직하고 부지런한 채널이었다. 한 영상에서 그가 유튜브 성장기를 언급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돈 주고 구독자를 샀는데도 잘 안 되더라고요." 내 귀를 의심했다. 또 다른 게임 유튜버도 비슷한 말을 했다. "알고리즘 흐름을 탈 때까지 계정을 지우고 만들고 반복했어요."
나는 그동안 자유로운 거래가 공정한 가격을 형성한다는 논리를 브런치에 대입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승자는 정직해 보였기 때문이다. 최종적인 승자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정의로운 속임수였을까? 이런 발상이 설득력이 없는 원인은 발언의 주체가 패배자여서다. 불평과 불만으로 보일 뿐이다.
그동안 도덕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비판했다.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질문을 바꿔보자. 자유지상주의자들의 경제관념이 공정하지 않을까? 최대행복 최소불행을 추구하는 공리주의는 도덕적이지 않을까? 법을 지키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데 무슨 명분으로 비판해야 할까? 브런치도 마찬가지다. 글을 올리고 조회수를 올리는 행위는 경쟁이다. 약육강식법칙을 따르는 냉정한 세계다. '좋아요'를 누르고 글을 읽지 않는 행위를 생존의 수단이라 말한다면 어떻게 비판할 수 있을까?
타인의 도덕범위를 강제할 수는 없다. 자신과 도덕범위가 다르다고 하여도 악으로 규정할 수 없다. 돈으로 구독자를 샀다던 유튜버는 한국을 알리는 긍정적인 콘텐츠를 제작하고 기부도 활발하다. 게임 속에서 사기를 치던 지인은 현실에서 모범 시민이다. 가장 존경하는 작가도 '좋아요'만 누르고 읽지 않는 사람일 수 있다. 정답은 없는 것이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어느 브런치 유저의 구독자 구매를 눈치채서다. 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좋은 글을 쓴다. 인성도 좋아 보이고 인기도 많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러한 행위(구독자를 사거나 좋아요를 누르고 글 읽지 않기)를 함으로써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면 하지 말자는 것이다. 반대로 경쟁의 일환으로 여긴다면 해도 된다. 효율을 따지거나 진실게임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아상이 병들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