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멜
하멜 표류기는 '난선제주도난파기'라고도 불린다. 1653년 네덜란드 무역선이 난파되어 13년 28일 동안 조선에 억류되었는데 선원중 서기였던 하멜이 조선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제주도에 표류한 이들을 조사하기 위해 서울에서 파견된 통역은 '박연'이었다. 박연도 네덜란드인이다. '연'은 그의 이름 얀 얀세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의 '얀'이라고 한다. 하멜과 박연이라는 인물 각각은 국사시간에 들어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만나서 인연을 쌓았다는 사실은 새로운 정보였다.
그(박연)는 약 57, 8세 정도 되어 보였는데, 놀랍게도 모국어를 거의 다 잊어버리고 있어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처음에는 저희들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만, 저희들과 약 한 달 동안 같이 있다 보니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 역사적 기록보다는 과학적 측면에서 흥미로운 말이었다. 모국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도 신기한데 짧은 기간에 회복되었다니. 모국어 소통이 가끔씩 개방되는 것과 완전히 차단되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걸까?
그들은 저희들의 멋있는 풍채(그들은 흰 살결을 높이 존중합니다.) 때문에 그들 나라 사람보다도 저희들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화장품 광고에서 '하얀 피부'를 강조하자 "한국인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말하던 흑인이 떠올랐다. 한국인은 억울할 법한 말이다. 당시 조선인 중 99%는 흑인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백인인 하멜조차도 온 동네 구경거리였으니 말이다. 미의 기준이 그랬을 뿐 인종과는 무관했다. 우리 조상들은 백인을 '홍인'이라고 불렀다. 백인을 우월하게 여겼다면 하얀 피부보다 '붉은 빛을 띠는 피부'를 선호했을 것이다.
아들이 있는데 딸들이 유산을 분배했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또 여자들이 시집갈 때는 옷이나 그 밖의 일용품만 가지고 갑니다.
- 얼마 전 읽었던 <우물 밖의 개구리가 보는 한국사>가 떠올랐다. 책은 조선에 자리잡은 유교를 전과 후로 나누어 설명한다. 하멜의 표류시기는 변질된 유교가 자리 잡은 시점이었다. 조선의 초기 유교는 중국과는 달랐다. 대표적 풍습이 '윤행'이다. 윤행이란 모든 형제자매 아들 딸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는 것이다. 당시의 상속이란 제사를 모시는 비용(노동력)이 포함된 것이다. 따라서 여성도 공평하게 상속을 받았다. 하멜이 100년 전에 표류했다면 달라졌을 기록이다.
문자를 쓰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중국과 일본의 글자와 같습니다. 그들의 책은 모두 이런 글자로 인쇄되어 있으며 국가나 정부 관계의 모든 문서도 그 문자로 쓰입니다. 둘째는 굉장히 빨리 쓰는 글씨로서 네덜란드의 필기체와 비슷합니다. 이 문자는 고관이나 총독들의 포고나 청원서의 서명에 사용되며, 또 편지 쓸 때에 사용됩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것을 잘 읽을 수도 없습니다. 셋째는 가장 낮은 수준의 문자로 여자나 일반 백성들이 사용합니다. 이것은 배우기 쉬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을 아주 쉽게 또 그 음을 아주 정확하게 쓸 수가 있습니다.
- 셋째가 한글일 것이다. 한글이 천대받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기록으로 접해보니 더욱 와닿았다.
하멜 표류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는 '타타르인'이다. 하멜이 언급한 타타르인은 조공을 받으러 온 사신 행렬을 의미한다.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겪었음에도 극심한 기근이 찾아왔다. 하멜의 말에 의하면 조선은 도둑의 소굴이었고 굶어 죽은 시체가 수천이었다고 한다. 책 후반부에는 탈출에 성공한 하멜이 일본에서 받은 심문기록이 있다. 하멜은 일본에게 조선의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조선의 외교안보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왜란, 호란, 조공, 기근, 수탈, 백성의 반 이상이 노비. 헬조선은 여기에 있었다. 같은 시각 일본의 항구에는 네덜란드 선박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도열해 있었다. 이후 300년이나 버텨낸 조선을 대단하다고 말해야 할까? 그러한 조선 침탈에 300년이나 걸린 일본이 무능한 것일까?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