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쓰기 기록
나의 브런치 첫 글은 2018년 3월이다. 167개의 글과 1개의 브런치북이 있다. 구독자는 96명이다. 신세한탄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던 이유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이 글을 읽게 될 소수가 나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대화를 잘하는 아이였다. 발표나 연설이 아닌 스몰토크에 능숙했다. 특히 1:1 대화에 자신이 있었다. 여자친구도 없는 녀석이 여자 아이들의 연애상담으로 몇 시간씩 수화기를 붙드는 날이 많았다. 이것을 재능으로 착각했다. 현실은 수다 스킬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대화를 잘한다는 착각이 커져가던 중 기이한 문장을 마주했다. "글은 말을 옮겨 적은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글도 잘 쓰겠지?" 그 후 네이버 블로그에 말 같지도 않은 글을 배설하기 시작했는데 쓸데없이 성실해서 수 백개의 포스팅을 했다. 내가 네이버 관리자였다면 결단코 저품질 블로그 선고를 내렸을 것이다.
의사소통 능력이 DNA에 저장되어 있다는 증거는 많다. 아기가 내 얼굴보다 아이돌 얼굴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누가 위협적인지를 본능적으로 알아서이며 수천 년 동안 문명과 동떨어진 원시부족의 유물에 그려진 인간의 표정은 우리와 일치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의 미세한 표정변화와 목소리의 높낮이를 해석하여 원활한 의사소통을 이끈다. 대화에 소질이 없다는 말은 사회화, 환경, 성격의 영향이 크다. 말수가 적은 사람도 어딘가의 누구 앞에서는 반드시 수다쟁이가 된다. 반면 읽고 쓰는 능력은 DNA에 포함되지 않는다. 인류가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시기는 구텐베르크 혁명 이후이며 불과 500여 년 전이다. 500년 만에 종의 특질이 눈에 띄게 바뀐다면 진화론의 다윈은 없었을 것이다. DNA에 없는 것은 훈련을 통해서 얻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읽고 쓰는 DNA가 없다. 재능을 보유했다고 여기는 현상은 지능이 높거나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 둔 경우일 뿐이다.
글쓰기 조언에 빠지지 않는 항목이다. 회의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기약이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꾸준히 하고도 결과를 내지 못한 사례를 목격하기 때문이다. 블로그 시절 1일 1 포스팅을 1년 동안 지속했다. 꾸준함이 답이 아니라는 산증인일까? 까보면 별거 없다. 5분 만에 작성한 음악, 영화 추천 포스팅이 많다. 꾸준함은 양이 아닌 질로 채워야 한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내겠다는 각오는 가끔씩 독이 된다.
유튜브에는 수백 개의 영상을 올리고도 구독자가 1천 명이 안 되는 채널이 많다. 3년 동안 일주일에 2~3개씩 '꾸준히' 올렸지만 구독자가 500명 이하인 채널도 보았다. 그들 꾸준함의 공통점은 공장의 제조 라인에 있는 기성품 같다는 점이다. 1년 전 영상과 오늘 영상을 분간할 수 없다. 조회수, 좋아요, 구독은 일종의 피드백이다. 어느 정도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노선을 틀어야 한다. 여기서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난다. 살면서 보고 들은 누군가의 성공신화는 실패에 굴하지 않는 끈기이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집념이었다. 정말 그럴까? 자신이 신화의 주인공이 아닐 수 있다는 현실을 무능으로 해석해선 안된다. 성공에 '신화'가 붙을 정도면 운이 따라야 한다. 꼭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전략을 바꾼 후 사람이 모였을 때 다시 써도 늦지 않다. 다른 전략이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반드시 그 길이 정답이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부족한 것이다. 원 히트 원더는 한 가지를 성공했다는 의미이지 한 가지만 했다는 말이 아니다. 글 몇 개로 수천의 구독자를 모은 사람은 다른 곳에 수 천의 글이 있다.
"반응이 없을 때에는 노선을 틀어라!"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마음에 간직하고 대중적인 글을 써야 할 것만 같다. 자극적인 제목으로 이목을 끌어야 할까? 유행하는 키워드를 조사해 볼까? 똑같은 업무를 하면서도 각자가 받는 스트레스는 다르다. 직장과 일상을 칼같이 나누면 퇴근 후가 자유롭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여서 노선을 트는 행위를 전략으로 바라보면 거리낌이 없다. 내 글이 많이 읽히게 하는 선택이다. 누가 보아도 이쪽의 성공률이 높다. 하지만 노선을 틀지 못하는 부류가 있다. 나 역시 그 동네 사람 중 한 명인데, 우리 같은 부류는 전략적 선택을 굴복 또는 가치관의 훼손으로 여기는 듯하다. 굽히느니 부러지겠다는 신념도 있어서 글을 안 쓰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의 탈출구는 양질의 꾸준함으로 객관적 우위를 점하는 것인데, 이것은 고행의 길이며 지속하기 어렵다. 결국 돌고 돌아 꾸준함으로 왔다.
앞에서 언급했듯 인간은 읽고 쓰는 재능을 타고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글쓰기 재능이 존재한다는 말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본격적인 글쓰기는 사춘기 이후다. 사람들의 눈에는 교육과 훈련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젊은 작가는 여지없이 독서광이다. 그들은 이미 10여 년 이상 혹독한 훈련을 했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의 산증인인 그들의 학습량은 상상 이상이다. 게다가 스펀지 같은 어린 시절은 고효율이다. 이 갭을 메우는 것이 불가능해 보여서 재능으로 평가받는다.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면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을 구사하고 그들보다 많은 문법지식을 쌓을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모국어가 될 수는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나는 서른이 훌쩍 넘어서까지 독서를 하지 않았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하루빨리 독서를 시작하길 바란다.
비소설이 재능의 영역이 아님은 명백하다. <3일 만에 완성하는 초전도체 여자친구>는 누구라도 읽고 싶을 것이다. 독서와 글쓰기가 늦었던 베스트셀러 작가는 많다. 하지만 소설은 다르다. 스티븐 킹은 인터뷰에서 "등장인물이 스스로 선택하고 말을 걸어온다."라고 말했는데, 한국의 어느 소설가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글 좀 쓴다는 나의 지인도 그랬다. 그들은 어떠한 정신 체계 감각을 형성한 듯한데 '재능'이라는 표현 외에는 적절한 어휘가 없다. 소설의 아이디어와 자료조사는 비소설의 영역이다. 벤자민 퍼시는 <쓴다면 재미있게>에서 소설 쓰는 기술을 제시한다. 소설에 필요한 '비소설 재료'를 과학적으로 활용한다. 통계를 분석하고 플롯을 연구한다. 그의 지도를 받고 소설가가 된 제자도 많다. 이쪽에서 접근한다면 소설은 재능이 아니다.
타인의 글쓰기 능력은 시기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여섯 살 때부터 발레를 했다면 지금 두 다리를 찢은 채로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굳이 질투를 해야겠다면 지능이다. 정자와 난자 시절부터 발레를 했더라도 타고난 체형은 어찌할 수 없다. 지능차이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지능이 낮으면 같은 노력 대비 기억에 남는 어휘가 적고 인과관계 분석이 늦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익숙해질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 바라보는 세상을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다. 1+1을 떠올려보자. 머릿속에 떠있는 2는 어느 방향에서 등장했을까? 폰트와 크기는? 1은 언제 왜 어떻게 사라졌을까?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글쓰기 감각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의식세계를 공유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글쓰기 감각이 우월한지 열등한지는 누구도 증명할 수 없다는 의미다. 변수는 계산할 수 없다. 나머지를 증명하다 보면 어떠한 해답이 나올 것이다.
글을 자신 있게 인터넷에 올리게 된 계기는 무관심 덕분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이 말은 글에도 적용된다. 쓰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다. '작가 공포증'에 걸려서 "나 같은 게 무슨 글이야."라며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상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는데 암기하고 있는 작가 이름이 몇이나 되는지 떠올려보자.
직업이 있어야 한다. 경험은 글감의 근본인데 직업은 경험의 근본이다. 직업에서 파생되는 통찰이 트렌드이기도 하다. 어차피 글만 써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헤밍웨이의 환생이라 하더라도 장담하지 못한다. 대안으로 자기 브랜딩, 강연, 유튜브 등이 있다지만 어쨌든 글쓰기가 아니며 출판이라도 해야 시도할법한 도전이다. 글만 써서 먹고살겠다는 발상은 너무나 모험적이다. 동경하는 작가들도 직업이 있었거나 심각한 빈곤을 겪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전략을 편법으로 여겨선 안된다. 비정상적으로 정직한 사람이 많다. 작가란 오직 글로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 그들은 과장하는 일이 없으며 자기 PR을 하지 않는다. 먼저 다가가서 댓글을 남기지 않는다. '브런치 성공전략'을 요행으로 치부하며 콧방귀를 뀐다. 인기 있는 키워드인 이혼, 시댁, 퇴사 등을 마주할 때마다 한숨을 내뿜으며 브런치의 수명을 걱정한다. 산신령이 될 작정일까? 현실과의 타협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현실인 것이다. 정체가 불분명한 사명감은 버려야 한다.
브런치는 피드백에 한해서는 최악의 환경이다. 어떻게든 다른 통로를 마련해야 한다. 쓸수록 는다지만 자기 객관화에 서툴면 제자리걸음이다. 글을 묵혀두는 대안도 있지만 양질의 피드백 제공자를 찾는 편이 확실하다. 1순위는 가족과 친구다. 개방적인 플랫폼에 올리면 다수의 피드백을 받지만 악플도 감당해야 한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피드백을 원하는 상대를 찾아서 서로에게 피드백을 주는 것이다. 아쉽게도 피드백을 교환하는 시스템은 발견하지 못했다. 모집글을 올리거나 메일과 DM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