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아의 이중성과 거울자아
소설 원작 영화는 원작 팬들의 불만에 시달린다. "원작을 훼손했다.", "케스팅이 엉망이다.", "그 장면을 그렇게 묘사해서는 안 됐다." 어느 부분에 이르러서는 원작 팬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일어난다. 책에서 받은 감동은 각자가 다름에도 각자의 한 명인 감독의 시각이어서?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를 떠올리면 그렇지는 않다. '영화 원작 소설'이 얼마나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은 영화를 보고 원작을 접한 사람이 많다. 나 역시 <해리포터>를 영화로 알게 되었는데, 이 부류의 의견은 소설 원작 영화만큼 혼란스럽지 않다. "영화가 더 낫네.", "책도 괜찮네." 정도의 차이일 뿐 캐스팅과 사건 묘사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극소수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작을 읽을 당시 캐릭터의 자아에 몰입한 독자가 거울자아를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가정해 보았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보는 나(I)'와 '보이는 나(Me)'가 동시에 존재해야만 자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써 '자아의 이중성'을 언급했다. 자아와 관련된 경험은 강렬하고 오래도록 지속된다. 예를 들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성향은 '보는 나'가 '보이는 나'를 필요 이상 의식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을 때를 떠올려보자. 독자는 화자의 자아에 몰입한다. 독자는 등장인물의 Me가 되어 I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떠올리는 원리와 같다.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떠올리는 이미지는 1인칭 시점이 많다. 소설의 카메라는 그녀의 뒤통수를 찍지만 영화는 그녀의 뒤통수와 뒤통수를 바라보는 Me를 담아내는 3인칭 시점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Me가 Me를 바라보는 상태이며 이는 윌리엄 제임스의 자아의 이중성에 위배된다. 윌리엄 제임스는 자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I와 Me가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설이 영화보다 자아를 인식하는 경험이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의 수준을 논하는 평론가적 시각을 떠나서 자아의 경험은 강렬하고 오래도록 지속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소설 원작이 영화보다 낫다는 견해는 자아 경험의 빈도에 초점을 맞춘다. 소설이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소설로 경험하는 자아가 '수준 높은 무엇'이라는 보장이 없다. 실제 자아와 혼동하여 잘못된 가치관을 갖는 경우도 있으며 상극인 자아를 만나면 작품을 비난하는 강도가 더욱 거세진다. 스토리와 정보가 목적이라면 영화가 낫다. 소설은 장면을 그리는 것이고 영화는 그려진 장면을 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뇌가 자아를 그려내는 프로세스, 즉 윌리엄 제임스가 말하는 자아의 이중성 확립조건인 '동시성'이 소설을 읽을 때에 자주 발현된다는 이야기다. 원작 팬들이 느끼는 무언가의 정체는 소설에서 느꼈던 자아 경험이 아니었을까?
사회학자 찰스 호튼 쿨리는 자아가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형성되고 타인의 시선 속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하며 '거울자아'를 언급했다. "나의 진짜 모습(자아)은 타인의 눈 속에 있다."는 개념인데, 자기 세계에 빠져서 고집부리지 말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여 자기 객관화를 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기 인식이 강렬한 사람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 진짜 모습은 꽁꽁 숨겨두어서 나만 알고 있는 것인데 무슨 소리야?" 찰스 호튼 쿨리가 사회학자임을 감한하면 그가 말하는 진짜 나의 모습(자아)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나'의 비중이 클 것이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꽁꽁 숨겨둔 '나'조차도 영유아기에 만들어진 사회적 상호작용 탓이겠지만 주제와 동떨어져 있으므로 생략하자.
2016년 HBO에서 방영된 <웨스트월드>에서는 거울자아로 인간을 복제한다. 타인의 눈에 담긴 모든 나를 수집한다. 친구 A의 뇌에서 나에 관한 모든 기억을 추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극히 일부일지라도 친구 A에게는 나의 모든 것이다. 따라서 친구 A의 시각에서 보면 완벽히 복제된 나다. 이것을 나를 아는 모든 이에게 적용시키면 사회적으로 완벽한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는데, 나를 복제함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기억만을 이용한다. 나의 DNA를 1도 사용하지 않은 복제인간인데 세상 모두가 나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나일까 복제일까? 철학적 사유는 덮어두더라도 거울자아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소설 속 자아도 거울자아를 학습한다. 다른 등장인물의 눈에 비친 거울자아를 보고 듣고 느낀다. "이런 성격은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이렇게 행동하면 타인은 이런 감정을 느끼는구나." 영화도 똑같은 장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이유로 영화는 나와 타인이 아닌 타인과 타인의 관계로 그려진다. 공감능력이 남다른 이들은 영화에서도 거울자아를 학습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견해는 소설 쪽에 손을 들어준다. 책으로 <해리포터>를 만난 기억은 영화와는 사뭇 다르다. 소설 속의 해리는 카메라가 존재할 수 없는 앵글에서 등장인물을 비추며 그들의 눈 속에 담긴 나(해리)의 거울자아를 체험한다. 영화는 A와 B가 싸우는 것을 보여주지만 소설은 내가 A가 되어서 B와 싸운다. A와 B의 갈등을 보여주는 영화 속에는 나의 거울자아가 없다. 소설 속 B는 나를 비난하며 B의 눈 속에는 나의 거울자아가 있다.
보편적인 인간을 이해하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이가 많은 요즘이다. 결국은 책을 읽자는 잔소리로 돌아온다. 거울자아의 핵심은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라는 의미다. 소설 속 자아는 수많은 거울자아를 마주하며 배우고 성장한다. 본래 사회화로 터득해야 할 감각인데 현실은 빡빡하기만 하다. 아이들을 과보호하면 안전은 좋아지겠지만 거울자아를 경험할 빈도가 낮아진다. 민폐를 끼친다는 이유로, 세상이 험하다는 이유로 타인을 멀리하고 두려워할수록 타인의 눈에 비친 나는 멀어질 뿐이다. 그렇다고 사회 분위기에 역행하는 것도 불안하다. 책이라도 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