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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황돼지 Jan 18. 2024

능력주의의 부작용

- 노블레스 오블리주

귀족사회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했다. 일부 귀족사회의 지배층은 오늘날의 기득권보다 겸손했다는 추측이다. 귀족사회는 횡포와 착취가 만연했지만 평화롭던 시기도 짧지 않다. 조선시대도 태평성대가 있었고 유럽도 존경받는 귀족은 많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 귀족은 의무를 진다 - 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마이클 샌델은 지배층의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귀족들은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영특한 노예, 자신보다 풍부한 지식을 지닌 평민을 겪어봤을 것이다.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겠지만 귀족으로 태어난 운에 감사하고 안도했을 것이다. 스티브잡스와 워런버핏이 우리 집 노예라는 상상을 해보자. 그들 재능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땠을까? 그러한 감정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초석이 아니었나 싶다. 귀족으로서의 의무 이면에는 경험적 겸손이 있었을 것이다.



능력주의 계급사회

 능력주의 사회는 경험적 겸손이 없다. 내가 잘했기 때문에 지금의 위치에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스티브잡스와 워런버핏은 지배받지 않는다. 그들의 노력으로, 그들의 실력으로 정당한 위치를 얻어냈다. 귀족사회를 벗어난 능력주의는 정답인 것처럼 보였다. 능력이 세습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양극화의 핵심은 세습이다. 초기의 능력주의는 양극화를 예상하지 못했다.


 양극화가 심해지면 계층 간 이동이 급감하며 보이지 않는 계급이 생겨난다. 마이클 샌델이 경고하는 능력주의 계급사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귀족사회다. 그렇다고 현대판 귀족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요해선 안된다. 이것이 능력주의의 딜레마다. 귀족사회가 낫다는 의미가 아니다. 귀족은 의무가 있었기에 위선이 있었다. 하지만 능력주의의 상류층은 의무가 없다. 성공한 사람은 의무를 갖는다? 피곤한 논쟁이다.



갈등과 세습의 전조

"능력이 부족한 너의 잘못이다."

"아니다. 사회와 환경이 문제다."


 국내에도 만연한 갈등이다. 동양 문화권은 개인을 탓하는 비율이 높다. 서양은 돈을 셀 때 지폐를 밖으로 향하게 한다. 동양은 지폐를 안쪽으로 세는데, 동서양의 전통적인 가치관 차이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동양에서는 환경을 탓하는 부류를 핑계로 치부하는 시선이 많을뿐더러 스스로를 자책하는 비율도 높다. 게다가 한국은 교육에서만큼은 수준 높은 평등을 보장하므로 핑계라는 지적이 타당해 보인다. 사실일까?


동서양 돈 세는 방식

 우리의 판단은 '핑계'에 무게가 쏠린다. 하지만 통계는 다르다. 미국 명문대 학생 6명 중 1명은 부모의 재산이 상위 1%다. 국내에는 집값 순위가 합격자 순위라는 통계도 있었다. 예를 들어 2009년 서울대 합격자 통계를 보면 8억 아파트에 거주하는 학생이 28명이다. 7억은 22명, 5억은 12명, 4억 9명, 3억 8명이었다. 21학년도 SKY의대 신입생 4명 중 3명은 고소득층, 로스쿨 10명 중 6명은 소득분위 9~10 분위 자녀였다. 그러니까 핑계도 맞고 세습도 맞는 말이다. 핑계로 일축하기엔 통계가 거짓말처럼 일관적이다.


대학생 가구소득 분포


양극화의 등장

 능력주의는 민주주의 속에서 자연스레 발생했다. 세습되지 않는 권력, 노력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예. 능력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앞세워 합리적인 정의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양극화 때문이다.

 

 위에서 밝힌 통계는 '세습'을 암시한다. 세습은 양극화를 가속화하고 계층 간 이동을 저해한다. 그 끝을 상상해 보자. 귀족사회와 다르지 않다.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는 것만큼 어려워진다는 의미다. 권력은 세습될 것이며 스스로 쟁취하는 부와 명예의 난이도는 잔다르크가 되는 것만큼 어려워질 것이다. 양극화의 끝은 또 다른 귀족사회다.



문제의 복잡성

 능력주의 계급사회의 자녀들에게 '세습'이라는 발언은 모욕에 가깝다. 수천만 원 과외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학생 본인의 희생과 노력이 없으면 선택받지 못한다. 고통과 노력이 커질수록 자신이 받은 고액 과외 혜택을 되돌아볼 여유를 잃는다. 때문에 "내가 잘나고 노력했다."라는 인식이 강화된다. 사회지도층으로 성장한 그들의 눈에 비친 국민은 무능력하고 게으른 패배자일 뿐이다. 그렇다고 부잣집 자녀들을 비판한다는 발상은 말도 안 되는 논리다.


 모든 실패를 내면화하는 움직임도 문제다. 일종의 가스라이팅에 가깝다.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너는 꿈이 있어!" 기회의 평등이 선물한 마법의 주문! 한때는 그랬다. 지금은 저주로 느껴진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 실패했다? 성공하지 못한 탓이 오직 '너'에게만 있다는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통계를 떠올려보자. SKY의대 신입생 75%가 고소득층이다. 다시 말해 저소득층도 얼마든지 25%에 들어갈 수 있다. 개인의 도전으로 여긴다면 해볼 만하다. 하지만 마이클 샌델이 지적하는 문제는 개인이 아닌 '사회 문제'다. 75%니까 사회문제라는 소리다. 25%로 생존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다. 우리 사회는 능력주의 양극화를 막아야 한다. 25%가 2.5%가 되면 귀족사회다. 그곳은 귀족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더욱더 어두울 것이다.



다양한 고민

 고전적인 해결책은 사교육비 감소와 공교육 강화다. 이거 우리나라에서 20년 전부터 외치던 것인데, 작년 사교육비 지출액이 역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중국, 인도, 미국 등도 사교육 열풍이 이슈다. 내 생각에는 기후변화를 막는 것만큼 요원해 보인다.


 정치도 막막하긴 마찬가지다. 숫자로만 따져보면 '부의 재분배'가 답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예민한 사안이다. 보수와 진보의 전통적인 가치관 대립인데, 이념 갈등으로 번지면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수가 있다. 기득권의 세습도 문제지만 무임승차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마이클 샌델이 제시한 해결방법 중 흥미로운 예시가 있다. 성공의 행운을 인정하는 한편 실패 또한 온전히 자신의 탓이 아닌,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공감되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서울대 입학정원이 3000명이라면 성적순으로 6000명까지 뽑은 후 제비 뽑기를 돌리는 방식이다. 합격자는 6000등 안에 들었다는 자신감을 얻고 행운에도 감사할 것이다. 불합격자도 6000등 안에 들었다는 자존감을 얻고 '불운'을 떠올릴 수 있다. 합격자와 불합격자의 서로를 바라보는 온도가 달라질 것이다. 타인의 시선도 달라질 것이다. 내면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비현실적이지만 문제의 핵심을 관통한 대안이다.


 고교 평준화 정책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내가 살던 지역은 고입시험이 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가 3곳 밖에 없어서 중학교 성적이 학급 내 10~15등 정도는 되어야 안정권이었다. 문제는 A 고등학교가 전통적 명문이었다. A 고등학교는 재단도 크고 성공한 선배도 많았다. 거의 모두가 1지망으로 A 고등학교를 써냈다. 커트라인을 넘긴 학생들은 '뺑뺑이' 즉, 랜덤으로 배정되었다. B와 C에 배정받은 아이들은 아쉬워했지만 어떠한 패배감도 느끼지 않았다. A에 배정받은 아이들은 즐거워하면서도 자만하지 않았다.


 세습의 고통이 크면 행운을 떠올리지 못한다. 실패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면 불운을 떠올리지 못한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칭찬하기 바쁘고 실패한 사람은 좌절에 올인하는 것이다.



불편한? 도덕 철학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운을 인정하지 않는다. 능력을 의심받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의 저자 마이클 슈어는 말한다. "미국에서 백인 남성으로 태어난 행운에 감사한다." 그는 자신의 성공에 수많은 행운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마이클 슈어는 능력이 부족할까? 그는 넷플릭스 <굿 플레이스>의 제작자다. 누구보다 능력이 뛰어나다. 그가 자신의 행운을 인정했다 하더라도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 마이클 슈어도 자신이 행복하다 말한다.


 도덕 철학의 본질은 행복한 삶이다. 선택과 후회, 옳고 그름을 되새기며 쾌락과 행복의 차이를 이해한다. 기후변화에 관심을 갖게 되고 동물의 고통을 이해하며 불운한 사람을 돕는다. 그런데 이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집단도 있다. 그렇게까지 말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쓰라린 심정이다. 도덕 철학이 '자발적 부의 재분배'를 유도한다는 주장이다. 부의 재분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면 공산주의 리스크가 있으니까, 햇볕정책의 일환으로 도덕 철학을 강조한다는 해석이다. 양극화가 완료된 세상도 그들과 똑같은 가치관이 만연할 것이다. 우리는 위기의식을 갖아야 한다. 혜안이 없더라도 직관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능력주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귀족사회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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