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탓인가 남 탓인가
일간 베스트. 줄여서 '일베'로 알려진 커뮤니티가 대한민국 혐오 시장의 정점에 있던 때, 그것의 파급력은 '빨갱이 색출'을 방불케 했다. 연예인은 사용하는 어휘를 자기검열하기 바빴고 일반인은 자신이 일베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당시 '일베 용어'를 사용했다는 정황증거만으로 매장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진실여부를 떠나서 엄청난 사회비용 손실이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온데간데없고 정의의 결벽증이 세상을 지배했다. 나도 일베가 싫다. 하지만 무고한 희생에 무관심한 사회가 더 싫었다. 일베 논란은 폭발적 관심을 받지만 정정보도는 노출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핑계와 변명으로 일축되며 조롱의 안주가 되었다. 때문에 빌미를 주지 않는 것이 최우선이어서 자기검열이 가속화되었다. 창의력과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었다. 만약 당시의 분위기라면 지금 이 글도 "일베를 두둔한다."며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정의의 결벽증은 개인의 손실도 야기한다. "어? 여기 일베 있는 것 같은데? 난 빠질게." 일베와 조금이라도 연관되면 안 된다는 결벽증은 마땅한 자기 권리를 위협했다. 예를 들어 20명이 모여야 출발할 수 있는 게임 도전 과제가 있는데 19명 중 1명이 일베로 의심된다며 탈퇴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다른 곳에서 20명이 모일 때까지 다시 대기해야 하는데, 거기도 일베가 없다는 보장이 없다. 보통이라면 구성원에게 일베의 퇴출을 요구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과도한 결벽증이 극단적 선택을 이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사회 곳곳에서 일어났다. 자전거 동호회, 독서 모임, 동창회 등. 정의의 결벽증은 정의구현이 아니라 고립과 손실만을 남겼다.
학창 시절 친했던 친구가 돈다발을 보여주었다. 리니지라는 게임에서 사기를 쳐서 번 돈이라며 자랑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절교를 다짐했다. 또 다른 친구는 여자친구와의 잠자리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의자왕의 영혼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 친구는 여자를 노리개로 여겼다. 나는 마음속으로 절교를 다짐했다. 관리자에게 뒷돈을 쥐어주어 취업한 지인, 부모에게 싸가지 없는 어휘를 남발하던 친척, 생산직 종사자를 벌레 취급하던 그 녀석, 사랑은 모르겠고 일단 아이를 낳아야 해서 결혼하겠다던 그놈, 아부와 가식이 실력보다 중요하다던 그 형. 나는 마음속으로 절교를 다짐했다.
정의의 결벽증은 대인관계를 좁혔다. 이제는 내가 기피대상이 된 것 같다. 돌아보면 합당한 절교도 있었지만 나의 가치관이 옳다는 아집이 많았다. 결벽증이 백 번 타당한 정의에서 온 것이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은연중 자신의 가치관을 우월하게 여기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단점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과의 타협이 불의는 아니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위선적인 자신을 인지하기 시작하면 정의의 결벽증이 자신에게 화살을 겨눈다. 남는 게 없다. 파국으로 치닫지 않으려면 거리는 두되 고립되지는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