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문 원주 당근 생산자
끝을 알 수 없어야 이야기가 더 재밌지 않은가. 당근은 씨를 뿌리고 적어도 백 일은 보살펴야 제 모습을 갖춘다. 씨를 뿌린 지 보름쯤 지났을 무렵에 찾은 당근밭에는 스포일러 따윈 없었다. 이제 막 손톱만큼 올라온 본잎을 바라보며 풍흉을 가늠하는 것은 소용도 없고 생을 갓 시작한 당근에도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수확을 앞두고 무르익은 작물에만 풍경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털실만치 가느다란 대롱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는지 곧게 쭉쭉 뻗어 자라는 줄기, 줄기 끝에서 새의 깃 모양으로 갈래지어 나는 잎사귀, 모래가 많이 섞여서 햇볕을 따라 반짝이는 흙의 모습은 처음 보는 당근의 풍경이었다.
우리나라 친환경 농업은 원주에서 시작된 협동조합운동과 지속해서 연대하며 발전해 왔다. 1960년대 말 고리채에서 농민과 소상공인을 보호하기 위해 원주 신용협동조합을 결성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1985년에는 생명 사상을 토대로 도시와 농촌이 농산물을 직거래하며 상생하는 길을 열고자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호저면에서는 원주생명농업이 1989년 설립돼 30년째를 맞는 올해까지 지역 농업과 환경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 왔다. 이 중심에는 역시 생명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친환경 농업에 전념해 온 170
여 명 원주생명농업 생산자들이 있었다.
호저면에는 두 번째 와 봐요. 지난해 여름에 감자 농사 지으시는 박영학 생산자님 뵈러 왔었어요.
원주생명농업이 호저면에서 시작해서 회원 생산자가 여기 많이 살아요. 그래서 원주생명농업 처음 시작할 때 이름이 호저생협이었어요. 저와 박영학 생산자도 원주생명농업 회원이에요.
도봉구 시설에서 공급받는 물품 중에 원주생명농업 생산자님들이 농사지은 것이 많잖아요. 원주생명농업이 어떤 곳인지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올해 농사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제가 당근 농사도 하지만 양파 농사도 지어요. 올해 양파 농사가 너무 잘 돼서 양팟값이 폭락했잖아요. 지난해 양파가 1kg당 1,500원 정도 받았는데 올해는 농민들이 시중에 500원에 팔 정도였어요. 올해 저는 1,300원에 양파를 냈어요. 원주생명농업은 소비자 조직과 미리 약정해서 계약 재배를 해요. 그래서 시중 가격이 폭락해도 농민한테 적정가를 보장해 줄 수 있어요. 반대로 미리 약속한 값에 거래하니까 시중 가격이 폭등해도 농민이 값을 더 받지 않고요. 농업에 투기성이 강해지면 농민과 소비자는 손해를 보기 마련이에요. 당근이나 양파처럼 저장성이 있는 농산물은 유통업자가 한 번에 많이 사들인 뒤에 물가에 따라 되팔 수 있으니까 투기 대상이 되기 더 쉽고요.
농업이 지속 가능할 수 있는 방식을 실천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한 가지 농사를 크게 짓지 않는 것도 원주생명농업의 생산 원칙이라고 알고 있어요.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해서는 친환경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논농사와 한우 사육을 연계하는 지역순환 농업, 소규모 다작물 생산체계가 원주생명농업의 생산재배 원칙이에요. 저는 당근과 양파, 감자를 친환경으로 농사짓고 있어요.
양파, 감자는 이제 수확이 끝났을 시기잖아요. 그러면 당근이 올해 마지막 농사인가요?
네. 원주는 다른 지역과 다르게 겨울에 큰 추위가 오니까 하우스 농사도 하기 어렵거든요. 당근은 보통 씨를 뿌리고 100일은 지나야 거둘 수 있어요. 7월 20일에 심었으니까 10월 하순께에 수확을 시작해서 11월에 마치면 올해 농사가 마무리되겠네요. 당근은 생육 기간이 100일에서 120일 사이로 다른 채소보다는 조금 긴 편이에요.
생육 기간이 조금 더 길면 일도 조금 더 길게 해야겠어요.
그렇지요. 그런데 며칠 더 일하는 게 힘든 것보다 무농약으로 농사를 짓다 보니까 제초제를 못 써서 품이 많이 들죠. 사람 손으로 하나하나 김을 매야 하니까요. 또 해충도 더러 찾아오고요. 당근에는 산호랑나비라는 해충이 자주 발생해요. 한번 오면 잎자루만 남겨두고 잎을 모두 다 갉아 먹어 버려서 골치 아프지요. 그것 잡으려고 한밤중에 밭에 가기도 해요.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일 텐데요.
머리에 헤드램프를 쓰고 잡는 거예요. 산호랑나비가 주로 밤에 활동해서 벌레를 잡으려면 밤에 밭에 가서 하나하나 손으로 잡아야 해요. 풀도 벌레도 사람 손으로 다스리죠. 당근 농사가 150평이라고 하면 농약을 쓰는 관행농에서는 작은 규모예요. 하지만 이렇게 제초제와 살충제 대신 사람이 직접 김을 매고 벌레를 잡다 보면 결코 작은 농사라고 할 수 없죠.
당근은 뿌리를 먹는 채소잖아요. 그래도 잎이 잘 커야 농사가 잘 되나요?
잎이 중요해요. 잎이 광합성을 해서 양분을 얻은 다음 뿌리로 내려줘야 뿌리가 알맞게 자라나요. 어떤 채소든 거둬 먹는 것이 제대로 결실을 보려면 작물의 모든 부분이 제 역할을 잘 해줘야 해요. 또 흙도 중요해요. 밭이 너무 질지 않고, 물 빠짐이 잘 돼야 당근이 잘 자라나요. 고랑에 물이 이틀 넘게 고여 있으면 당근이 갈래지어서 안 돼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농사가 잘 되려면 작물을 고생시키는 것도 중요해요.
작물을 고생시켜요?
네, 처음부터 진 땅에 파종하지 말고 마른 땅에 씨를 뿌리는 거예요. 흙에 물이 적으면 작물이 수분을 찾아서 깊이 뿌리를 내릴 테니까요. 씨 뿌린 곳 가까이에 물이 많으면 뿌리를 깊이 뻗을 필요가 없잖아요. 사람도 너무 귀하게만 대하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적어지는 것처럼 당근도 채찍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거죠. 사람과 비슷한 점이 또 있는데 당근도 적정한 주거 면적이 필요해요. 성장에 적당한 공간이 있어야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튼튼하게 자라요. 그래서 어느 정도 자라면 솎아주기를 부지런히 해서 작물 사이사이에 틈을 만들어 주죠. 솎아주기는 당근 농사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부분이에요.
요즘 도시에서는 어떻게 보면 친환경이 유행이라면 유행이잖아요. 그렇다면 친환경 농사가 고되기는 해도 생산자에게도 더 많은 기회가 생긴 것이 아닐까요?
농민보다는 중간 유통회사의 기회가 크게 열렸다고 생각해요. 관행에서 친환경으로 생산 방식이 달라졌을 때 유통과 소비 방식도 함께 바뀌어 나가야 농업 환경이 개선될 수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공감대가 많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봐요. 친환경을 상업성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공공급식처럼 큰 틀에서 유통 체계나 소비 방식에 새로운 제안을 시작하는 곳이 많아진다면 이 유행이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죠.
생산자님 혹시 스포일러라는 말 아세요?
모르겠네요.
결말을 미리 알려줘서 재미를 떨어뜨리는 걸 말하는데요. 이 당근밭은 농사가 잘 될지 못 될지 스포일러가 전혀 없네요. 지금까지는 수확기에 맞춰서 생산지를 찾아와서 조금 낯설어요.
잘 여문 밭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예요. 같은 당근도 밭에서 보는 것과 마트에서 보는 건 분명히 다르거든요. 하지만 수확기에 오면 우리가 먹을 뿌리가 얼마나 잘 컸는지만 눈이 가지 잎이나 줄기는 잘 보이지 않아요. 밭에 왔다는 건 과정이 궁금한 거잖아요. 당근은 이렇게 조그마한 잎과 줄기에서 시작해요. 그 전에는 이보다 더 작은 씨앗이 있었고요. 소식지가 언제 나와요?
9월 초에 대부분 배포가 되는데 10월에 받는 분들도 더러 있을 거예요.
9월 초면 한 달 반쯤 지날 무렵이니까 뿌리에 한참 살이 붙기 시작할 때네요. 10월 말에는 수확을 시작할 거고요. 지금 보는 이 조그마한 것들을 잘 기억해 주세요. 그러고 나서 때가 돼 다 익은 당근을 받아보면 더 반갑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