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사용 페트병이 농기구랍니다. 네?
인류 문명의 역사를 재료 면에서 볼 때,
지금 우리는 석기 시대-청동기 시대-철기 시대에 이어 플라스틱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다.
가공이 쉽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데다, 값이 싸다는 장점 덕에 그 사용량이 1980년대 이후에는 철재 사용량을 넘어섰다고 하니 가히 플라스틱 시대라 할 만하다. 하지만 플라스틱은 많은 장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단점 크다. 자연에서 분해되기까지 5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려서 지구 곳곳에서 매립 산을 이루고, 바다에 떠다니는 쓰레기 섬을 이루는 것이다.
페트병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대표적인 제조품이다. 그린피스가 2019년 발표한 <플라스틱 대한민국>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연간 소비되는 생수 페트병은 4,900,000,000개로 한 사람당 페트병 96개를 배출한다. 다른 플라스틱 쓰레기보다 재활용률이 높은 편이지만 혼합 배출되는 경우가 많아 제 쓰임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각내거나 녹여 ‘재활용’하는 것이 아닌 되도록 현재 모습 그대로 ‘재사용’하는 모습이 사랑스레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농사 현장에서 재사용 페트병은 유용한 농기구로 쓰인다. 은행잎·쇠비름·깻묵 등을 직접 발효해 만든 액비액체로 된 거름를 담기도 하고, 페트병 뚜껑에 작은 구멍을 뚫고 물을 채워 거꾸로 묻어 두면 한두 방울씩 나오는 물이 흙을 적셔 주어 작물 생육에 도움을 준다. 그뿐이 아니다. 반으로 자르거나 옆면에 구멍을 낸 뒤 안에 막걸리나 설탕물을 넣어 두면 벌레를 유인하는 덫이 되고, 페트병으로 바람개비를 만든 뒤 지지대를 땅에 꽂아 두면 그 소음으로 두더지를 쫓는다. 볼품없어 보이지만 참으로 다재다능한 농기구인 셈이다.
페트병은 토박이씨앗을 담는 용기로도 귀히 쓰인다. 토박이씨앗은 생태계에서 대대로 살아왔거나 오래도록 재배하며 전해 내려와 우리나라 기후와 풍토에 잘 적응한 종자를 의미한다. 유전적 다양성을 유지하여 기후 위기에도 잘 적응할 수 있고, 생산자가 직접 씨앗을 받아 농사지을 수 있으니 거대 자본에 맞서 종자 자립과 농부권 확보에 유리하며, 농사와 요리 문화의 보존과 계승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그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젊은 생산자나 텃밭 농사를 짓는 도시 농부들 위주로 토박이씨앗 보존 운동이 유행처럼 번져 가고 있다.
종자 회사에서 사지 않고, 작물에서 씨앗을 직접 갈무리해야 하는 토박이씨앗 농사는 씨앗을 잘 보관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관 자체는 어렵지 않다. 가장 좋은 씨앗을 골라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말린 뒤, 밀봉해 어둡고 서늘한 곳에 보관하면 된다. 내년에 바로 뿌릴 씨앗은 상온에 두어도 괜찮지만 1년 이상 보관할 경우 냉장실에, 그 이상을 원하면 냉동실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이때 천 주머니나 비닐봉지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불투명한 천 주머니의 경우 자주 들여다봐야 하고, 비닐봉지는 습병해충의 원인이 되는 습기이 생기기 쉽다. 투명하여 내부를 들여다보기 쉽고, 단단히 밀봉되며, 겉면에 씨앗 이름과 채종 연도를 적기 좋고,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세워놓을 수 있으니 씨앗 보관에 페트병만 한 게 없다. 토박이씨앗 농부의 냉장고 속에 물이나 음료보다 씨앗이 담긴 페트병이 많은 이유가 있다.
생각해 보면 재미있다. 잘 썩지 않아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페트병이 토박이씨앗의 생명을 이어가는 중요한 농기구로 쓰이다니. 500년 수명의 페트병으로 5,000년 넘게 이어갈 씨앗을 지키는 농부의 경험과 지혜가 놀랍다.
김현준 먹거리와 농업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 여섯 살 아이를 키우며 생명의 귀함을 매 순간 새로이 발견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