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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벌레처럼 맛있게 먹어야겠다

헤드 랜턴과 나무젓가락이 농사를 짓는답니다. 네?


농사는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들이 택하는 업이다.



볕이 뜨거운 낮에는 쉬어야 하는 까닭에 생산자 대부분은 여전히 어둑한 새벽부터 일을 시작한다. 세상 누구 못지않게 서둘러 일어나는 만큼 잠자리에도 일찍 든다. 밝을 때 일하고, 어두울 때 쉬는 일상이 자연 속 뭇 생명과 다르지 않다.


자연계와 다른 점이 있다면 농사에도 직장인처럼 야근이 있다. 야근하는 사정은 저마다 조금씩 달라서 낮에 수확한 작물을 밤에 포장해서 다음 날 새벽같이 전달하려는 이도 있고, 밝을 때 미처 만들지 못한 액비 등을 만드는 이도 있다. 친환경 농사를 짓는 생산자들은 여기에 야근 사유를 하나 더 보탠다. 바로 낮에는 숨었다가 밤에만 나타나 작물을 갉아먹는 벌레들을 잡는 일이다. 그중 배추흰나비 애벌레인 청벌레는 생산자가 잠 못 들게 하는 해충으로 특히 이름이 높다.


겨우내 우리 밥상을 책임지는 김장김치의 주재료인 배추 농사는 8월 초순부터 시작된다. 파종한 지 2주 정도 지나 잎이 여섯 장쯤 나왔을 때 모종을 밭에 옮겨 심은 뒤, 물만 제때 주면 100일 뒤 튼실한 배추를 수확할 수 있다. 글로는 두어 줄로 간단히 정리되는 과정이지만 실제로는 그리 만만치 않다.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생산자들도 유독 배추 농사를 하면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유가 있다.


배추 농사의 어려움은 역설적이게 배추가 맛있어서 발생한다. 부드러운 속살과 들큼한 맛을 지닌 배추는 청벌레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다. 청벌레를 달리 ‘배추밭의 악동’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이 녀석들은 낮에는 배춧속 깊숙한 곳에서 잠을 자다가 날이 어스름해질 때쯤 밤마실을 나와 신나게 배춧잎을 먹어치운다. 이튿날 아침 구멍 뽕뽕 난 배추를 보고 가슴 아파하지 않으려면 밤에 나가 눈을 크게 뜨고 벌레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밤이슬을 맞으며 청벌레와 사투를 벌여야 하는 생산자한테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돕는 헤드 랜턴은 효자나 다름없다. 헤드 랜턴은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다들 쉬는 밤에 무언가를 절실하게 해야 하는 사람, 그것도 양손을 자유롭게 써야 하는 사람이 만들지 않았을까. 배추 농사를 짓는 생산자처럼 말이다. 초가을 무렵, 배추 농사를 짓는 생산자는 꾹 조여 썼던 헤드 랜턴 자국이 이마에서 사라질 날이 없다.


헤드 랜턴은 수제 살충에 아주 유용하지만 과제를 완성하려면 도구가 하나 더 필요하다. 바로 나무젓가락이다. ‘그냥 손으로 잡고 말지 왜 굳이 젓가락으로? 그렇게 만지기 싫은가?’ 싶겠지만 이게 웬걸. 직접 해보면 배춧잎 사이사이에 숨은 작은 청벌레들을 손으로 집어내기는 전혀 쉽지 않았다. 작은 집게로 잡아보면 어떨까 했지만, 그 역시 마찰력을 발휘해 청벌레를 짝짝 집어내는 나무젓가락에는 미치지 못한다. 도시인의 얕은 셈법은 농부의 오랜 경험을 당할 수 없다.


글을 적다 보니 왠지 씁쓸하다. 관행 농사였다면야 독한 약 한두 번 뿌리면 끝날 일인데, 친환경 농사를 짓는 이들은 귀한 잠을 줄여가며 손으로 발로 뛰어야 비로소 할 수 있다니. 올해 만날 배추는 청벌레 보란 듯이 맛있게 먹어야겠다.





김현준 먹거리와 농업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 여섯 살 아이를 키우며 생명의 귀함을 매 순간 새로이 발견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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