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계가 벼농사를 짓는답니다. 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전에는 신경 쓰지 않던
물건의 쓰임새와 가치를 발견하는 일의 연속이다.
요즘 들어 더 많이 의지하는 것이 온도계다. 아이의 단잠을 위해 습도까지 함께 표시되는 온습도계를 눕기 전 항상 확인하고, 혹시라도 열이 있다 싶은 날에는 아이의 귀에 수시로 체온계를 갖다 댄다.
농사에서도 온도계는 중요하다. 생명이 살아가는 데 적정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나 작물이나 다르지 않다. 고추 모종이 왕성하게 자라는 25℃ 내외, 꿀벌이 활발하게 꽃가루를 옮기는 20℃ 내외 등, 저마다 활동하는 모습이 다양한 만큼 필요로 하는 온도도 제가끔이다. 키우는 작물이 가장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생산자는 하우스 시설 내 설치된 온도계를 수시로 들여다본다.
우리의 주식인 벼농사에서도 온도계가 중하게 쓰인다. 물론 벼가 잘 자라기 위한 온도가 있더라도 노지 농사 여건상 생산자 마음대로 조절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벼농사에서 온도계가 주인공이 되는 때는 언제일까. 바로 못자리에 뿌리는 볍씨 소독을 할 때다. 소독과 온도계.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듯 보이지만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볍씨에는 수많은 세균과 해충이 기생한다. 이들 불청객은 가을에 볍씨에 붙은 채 월동을 하고 봄부터 활동을 재개한다. 파종 전 소독을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도열병이나 깨씨무늬병 같은 곰팡이병과 벼잎선충 등 해충의 피해를 보기 십상이다. 관행 농사에서는 소독약 한두 번 뿌리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하는 일이지만 명색이 친환경 농사인데 그럴 수는 없다. 대신 뜨거운 물을 이용해 세균과 해충을 잡는 온탕침법을 쓴다. 이때 온도계가 귀히 쓰인다.
온탕침법은 자체는 어렵지 않다. 소금물을 이용해 볍씨 고르기를 끝낸 뒤 잘 말린 볍씨를 양파망에 담고 65℃의 물에서는 7분, 60℃ 정도라면 10분간 담갔다 빼면 끝이다. 물론 실제로 해보면 말처럼 간단하게만 끝나지는 않는다. 우선 온도가 가파르게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볍씨 무게의 열 배 정도는 되는 물을 가마솥에서 펄펄 끓여내야 하고, 담가 놓는 동안에는 뜨거운 물이 볍씨 안쪽까지 고루 스며들 수 있도록 양파망을 수시로 뒤집어야 한다. 소독이 끝난 뒤에는 볍씨가 열기를 너무 오래 품지 않도록 바로 찬물에 옮겨 헹궈줘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열기가 오르내리는 동안 생산자의 눈은 온통 온도계에 사로잡힌다. 너무 높은 온도에 노출되면 볍씨가 생명력을 잃어 싹을 틔울 수 없게 되고, 반대로 온도가 너무 낮으면 본래 목적인 소독이 잘 안 되니 적절한 온도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온도계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못자리는 농사의 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판에 볍씨를 뿌리는 일은 한해 벼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꼽힌다. 그렇다면 못자리에 앞서 볍씨를 고르고, 소독하는 것도 그만큼이나 종요로운 일이 아닐까. 일상에서 우리 아이의 건강을 지켜주는 온도계. 친환경 농기구로 변신해 세균과 해충을 없애는 일등공신으로 활약하며 맛있는 밥까지 만들어 주니 두 배로 고맙다.
김현준 먹거리와 농업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 여섯 살 아이를 키우며 생명의 귀함을 매 순간 새로이 발견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