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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 베드로 Nov 17. 2021

에필로그

나는 70 평생을 살아오며, 나름대로의 주관이 뚜렷해지며, 좌우명이랄까 뭐 그런 것이 자연적으로 형성되기도 했다. 한 4가지 정도였었는데, 얘기를 하자면, 그 첫째가 ‘道德觀念’(도덕관념)이며, 이어서 ‘易地思之’(역지사지) ‘人之常情’(인지상정) 끝으로 ‘過猶不及’(과유불급)이다. 아주 평범하고 별것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실행하면서 살아가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 이를 다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이를 행하려 노력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 중에서 나는 특히 도덕성을 가장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켜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싶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할뿐더러, 꼭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를 대입시키지 않더라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식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극한 상식의 벽이, 날이 갈수록 무너져가고 사람들은 한량없이 뻔뻔해지고 있다. 소위 말하는 ‘도덕 불감증’이다. 우리 속담에 ‘똥 뀐 놈이 성낸다’란 말이 있다. 요즈음은 속담이 아니라, 아예 그냥 일상으로 마주칠 수 있는 다반사가 되어가고 있다. 뻔뻔함의 극치는 그 정도를 넘어, 소시민은 그냥 당하고만 살아야 하고, 어디 하소연할 곳도 만만찮은, 낯 두꺼운 시대를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강도질로 모은 재산을 내어놓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는 그 파렴치한은. 29만 원 밖에 없다 했든 그의 뻔뻔함으로, 이미 많은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았고, 여러 사람의 가슴에 대못질까지 서슴없이 해 왔지 않았든가? 세상은 이렇게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함이 그 도를 넘어가고 있다.      

나의 삶에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사람은, 단연 아버지다. 부모를 공경하고 그들에게 효도를 다 해야 함은 자식으로서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나는 부모를 칭송하고, 조상님들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럽다. 그렇다고 내가 부모님이나 조상들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랑할 수 없는 내 처지가 아쉽고, 내 후손들에게 부끄러울 뿐이다. 덧칠이라도 해서 원그림을 바꾸고 싶으나 어디 그것이 마음대로 될 법이나 할 일이던가. 그러나 좋지 못한 그 밑그림이지만, 지금부터라도 그 위에 볼만한 모습들을 하나하나 그려나가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다. 잘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서전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 성인이 된 후 조금씩 알게 되는 아버지의 치부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문제는 당사자인 아버지의 떳떳지 못한 그 비루함이 문제였다. 이미 우리들은 성인이 되었고, 우리는 오히려 아버지의 솔직한 태도를 바라고 있었으나, 모든 것을 시대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의 잘못을 적당히 얼버무리며, 그것을 합리화시키려는 아버지의 그 모습은 우리를 다시 한번 실망시키고 있었다. 그 와중에 피해를 감수하고 계시는 어머니의 고통은 우리들의 인내심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라는 표본이 어느새 나의 아버지가 되고 있었다. 그만큼 아버지의 위선 된 말과 행동은 우리를, 특히 나를 자극시켜, 급기야는 아버지와의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를 몰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파렴치한 행동의 뒤에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가정을 팽개치고, 또 하나의 딴 가정을 가지려는 아버지의 시도는, 그 옛날에 이미 할아버지가 실행해왔던 그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말이다.     

먼 엣 날 나의 할아버지는 이미 조강지처와 자식들이 수두룩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감추고, 우리 할머니와 정혼이란 명목으로 다시 결혼을 한다. 조강지처와 딸린 자식들을 버려두고, 자신의 안위와 편안함을 위해, 실로 뻔뻔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감행하고야 만다. 그 불쌍한 우리 큰 할머니와 그 식솔들은 먼 지방에 유폐된 채 어렵고 질곡 같은 어려운 삶을 이어오고 있었다. 한참 후에 나타난 우리 큰아버지와 큰고모들은 할아버지의 그러한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비뚤어지고 왜곡된 우리 집의 역사는 아버지 당대에도 바로 잡히지 않은 채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왔었다. 큰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그 아들인, 사실상의 장자인 사촌 동생이 아버지에게 집안의 장자 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으나, 아버지는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시며, 되지도 않는 이유와 억측으로 그것을 합리화시키기에 급급했었다. 마치 당신의 잘못된 삶을 그렇게 변명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인 할아버지를 정당화시킴으로써 당신의 정당성을 확보하시려는 것 같이 보였다.     

‘박경리’ 소설 ‘토지’를 보면, 나와 비슷한 모습이 비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꼽추로 태어나 그 부모로부터도 버림을 당했던 ‘조병수’가 늙고 병들어, 노구가 되어 찾아온 그 부친 ‘조준구’를, 아무 말 없이 받아들여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다. 그 아들조차도 할아버지의 악행을 알고 있었기에 외면했으나, 아비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그였지만 묵묵히 아비의 똥오줌도 기꺼이 건사하며, 아비를 돌본다. 이러한 그의 행동을 보아왔던 주위 사람이 “아비의 악행을 방임함은 아비의 지옥행을 재촉하는 것이요.”라고 이르자, ‘조병수’가 말하기를 “옥련 존 자 깨서는 악모를 찾아 지옥에까지 갔다 하지 않았소.” 하였다. 이렇듯 자식은 아비의 그 어떤 행동에도 관계없이 자식의 도리를 다 함이 마땅하거늘, 불구인 몸에도 불구하고, 마음만은 어느 정상인보다 아름다운 그에 비하면, 나는 참으로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감춘다고 감춰지는 것도 아니오, 감춰져서도 안 되는 일이기에 나는 그것을 오픈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시, 다른 형제들은 아버지 바위 맞추기를 잘들 하고 있었지만, 내 눈엔 왜 유독 아버지의 민낯이 그렇게 뚜렷이 잘 보였는지 알 수가 없다. 어머니의 얼굴에서 그나마 살아있던 그 잔잔한 미소까지도 앗아갔던 그런 아버지가, 나는 정말로 못마땅했었다. 젊었을 때 아버지의 그 행패가, 아직까지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는데, 아버지의 노후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후회도, 변함도 없이 호기로우셨다. 우리의 권유에 영세까지 받으시고 영혼이라도 맑아지셨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은, 나의 헛된 망상으로 끝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롤모델로 설정하고, 그 반대의 삶을 살기를 결심했다. 비록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지극한 불효의 길이 될지라도, 나는 단호히 그들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음을 나는 다짐해 본다. 후세에 나의 이러한 결심을 옳게 이해하는 후손이, 단 한 명만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2010년 8월 1일. 염천 지절에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12년 만이었다. 그 12년이란 세월 동안에도 아버지의 삶은 당신 중심에서 결코 벗어남이 없이 그렇게 사시다 가셨다. 아버지를 맞이하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온유하신 어머니는 그래도 아버지를 따듯이 대해주시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덕장에 널린 황태, 오징어, 무시래기는 오랜 시간 자연의 조건에 몸 맡기고, 마냥 기다린다. 눈 오면 눈 맞고, 비 오면 비 맞고 태양이 바치면 감지덕지 감사하며, 바람 불면 부는 데로 순간에 자신을 내버린다. 이 가을 모든 것을 털어내는 나무들처럼, 내 인생 여정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덕장에 널려 흔들거리든 그들처럼, 푹 익은 모습의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멀지 않은 날에 만날 아버지께, 나는 과연 어떤 인사를 드려야 할지, 지금부터 좀 심각히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싶다.      

                                                                2019‘入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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