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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 베드로 Feb 24. 2021

그대들 있었음에

part 5 그대 석양이 아름다운가?

1. 또다시 시련이

     

그녀의 나이 마흔 하고도 여섯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을 세월을 짊어지고, 그녀는 힘들어하고 있었다. 남편을 원망해 보기도 했고, 그녀를 이 세상에 있게 해 준 엄마도 원망해 봤지만, 결국 자신에 대한 허무한 팔자 놀음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매일매일 지고 가야 할 짐은 천근인데, 그 무게를 조금이라도 감당해 줄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고, 언제 끝이 날지도 알 수 없는 세월만, 하릴없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아침이 밝아와 또 하루가 시작됨은 그녀에겐 바로 고통의 시작이었고, 잠자리에서 눈을 감는 그 순간에는, 다시 깨어나지 말 것을 기도하곤 했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았고, 지금의 이 고통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맡기고 싶을 만큼 그녀는 절박했다. 그녀는 이 시궁창 같은 현실에 깨금발을 디디며 억지로 버텨가고 있는데. 세상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희희낙락으로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에겐 남편과 아들과 딸이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의 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들 역시 각자에게 주어진 그들대로의 짐을 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또 그 시간에 따라 그녀의 삶의 무게 또한 줄어들고 있었으나, 그녀 자신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두움과 질곡에서만 헤매고 있는 줄만 알았던 그녀의 먼 앞으로, 한 줄기 햇볕이 스며들고 있음을 그녀도 나중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나이 마흔아홉. 또다시 시련 속으로 들어온 그는 묵묵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타고날 때부터 몸 구석구석에 베여있는 가난과 고생의 자국들은 오히려 그에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다. 힘들어하는 아내의 모습은, 그가 견뎌야 하는 삶의 무게보다 더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세상은 팍팍하기 그지없었으나, 그 에게는 그 틈새를 비집을 수 있는 작은 구멍들을 쉽지는 않았지만, 어렵게라도 찾을 수는 있었다. 또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어서 그 여지는 더 크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매일매일이 퍽이나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희망의 끈을 놓는 일은 결코 없었다. 또 하느님을 믿고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의 기도는 빼놓을 수 없었으며, 오직 가정의 평화를 빌며, 나름의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내 탓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그였기에 그는 담담했고, 그에 대한 어떠한 어려움도 견뎌낼 자신이 있었다. 마치 그는 고생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바로 자신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근 오십 평생을 살아오며, 그는 스스로의 힘을 키워왔기에, 그 누구의 도움도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도우심은 받고 싶었고, 또 그분은 도움을 주실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른 채 주어진 내 일만을, 묵묵히 하는 것이 그의 일관된 신념이었다.

     

7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우리들에겐 처음 대하는 이웃 마냥 낯설었다. 겨울 초입에서 여름 초입으로 진입하는 우리들을 반겨줄 그 아무것도 없었고, 찌는 듯한 더위는 벌써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은, 아폴로 눈병이 성행하여 모두들 힘들어하고 있을 때였으며, 아이들은 대학 1.2학년으로 풋풋히 자라, 그들의 세계에서 한창 꿈을 키우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 네 식구는 해우의 기쁨을 나눌 여유조차 가지지 못한 채, 바로 현실 타개에 나서야만 했다. ‘걸’이는 하숙집을, ‘민지’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일단 우리 부부는 부모님이 계시는 대구로 내려가, 인사부터 드렸다. 어머니께서는 고혈압과 당뇨로 많이 불편해하셨으나, 아버지는 꽤 건강하셨다.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아버지는 우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던 관계로, 그 표정 지체가 별로 반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엄마와의 관계도 항상 그래 왔듯이 따듯하게, 서로를 배려하는 분위기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부자지간이었지만 아버지와는 항상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고 있었던, 우리들은 더 이상의 냉랭한 분위기가 싫어 그곳을 벗어나고야 만다. 엄마가 아쉬움에 따라 나오긴 했으나, 미약한 엄마의 힘으로는 우리 부자관계를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다음을 기약하며,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다.

아이들 둘 등록금에 ‘민지’ 입학금까지 우리의 자산은, 점점 줄어들 가는데, 심상찮게 들려오는 국가부도설이 우리를 불안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었다. 아내와 상의를 한 결과, ‘민지’는 당분간 기숙사에 그냥 머무르게 하고, ‘걸’이와는 합치기로 하면서 ‘걸’이 학교와 가까운 수색에 방을 얻기로 한다. 한국의 부동산 가격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싼 것은 마찬가지였다. 가진 돈은 많지 않은데, 괜찮은 집을 얻기가 우리의 형편에는 무리일 수밖에 없어, 눈높이를 팍 낮추기로 작정을 했다. 마침내 찾은 집은 지하방이었다. 방 2칸에 화장실 1칸, 주방 겸 거실 약간. 참 한심하기는 하나, 일단 그렇게 시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먼저 ‘걸’이에게 미안했으나, 그는 하숙집보다야 부모님하고 같이 있으니 좋다고 애써 우리를 오히려 위로하고 있었다.

 

‘걸’이의 배려 어린 몇 마디가 나를 더욱 씁쓸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리하여, 우리 셋은 돌아온 한국의 첫 생활을, 지하방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서서히 다가서는 IMF의 그림자를 의식하지 못한 채, 나는 드디어 일자리 구하기에 나서기 시작했고, 시련은 이제가 시작에 불과했다.

      

얼마 전 유명 정치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전후야 어찌 되었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분의 그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야 있겠냐마는, 꼭 그래야만 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직업별 평균 수명을 따져 본다면, 정치인들의 평균 수명이 두 번째라 한다. 그 첫 번째가 종교인이고, 거짓말과 공갈 섞인 입담으로, 스트레스를 팍팍 해소하는 정치인들의 수명도 만만찮게 길다고 했는데, 너무 일찌감치 세상을 등졌다니 더욱 아쉬울 따름이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한 것을 너무나 잘 알 것 같은 지성인이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진하게 드는 것이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리라 본다. 잘 알다시피 선택은 물론 본인의 고유 권한임에는 틀림이 없다 할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의 생은, 선택의 연속성을 지닌 채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se)이다”라고. 오죽했으면 이런 말까지 나왔겠는가? 선택은 때로는 피치 못하게, 때론 필요에 따라 그러나 그것은 우리 주변 요소요소에 자리하면서, 수시로 우리를 압박하기도 한다. 태어남과 죽음은 신의 영역임이 분명할 진데, 우리가 마구 헤집고 교란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짚어 봐야 되지 않나 싶다. 그분의 선택은 정말 잘못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어떤 변명과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 창조사업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의 마지막은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이루어져야 함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하디 약한 인간은, 순간순간의 이러한 유혹에 노출되어, 가끔 자아를 상실한 채 생을 포기도 하고, 자학적인 삶으로 주위의 안타까움을 불러오기도 한다.

     

아내는 참 힘들어했다. 우리는 결혼생활을 해 오면서,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육체적인 고통까지 더 해지니, 아내는 그것을 감내해 내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사실 아내는 나 몰래 무슨 일인 줄은 모르겠으나, 일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애써 그것을 감추려 하고 있었으나,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벌이가 시원찮은 탓도 있었지만, 수시로 쪼여드는 생활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으리라 나는 생각했다.

수색으로 이사 후, 바로 찾아온 ‘IMF’ 사태는 나에게도 엄청난 파고로 다가서고 있었다. 대량으로 밀어붙이는 해고 사태와 구조 조정은 수많은 사람을 거리로 내몰리게 하고 있었으니, 이제 50이 다 된 내가 발붙이고 일할 수 있는 자리가 만만하게 나설 리가 있겠는가? 작은 급료라도 불사한 끝에 얻은 직종은 대방동에 있는, ‘유한양행’ 빌딩 지하주차장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이리저리 밀리다가 모인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다 모인 그곳은 인간 백화점을 모아놓은 곳 같았다. 심지어 비행기를 조종하던 조종사까지 그곳으로 밀려왔으니, 당시의 상황은 충분히 설명이 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저녁마다 골목 끝으로 아내를 마중 나가곤 했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지치고 지친 아내의 애잔한 그림자가 가로등 불빛 아래 나타날 때면, 나는 서글픔과 괴로움에 혼자 울음을 삼키기도 했다. 그 당시 가끔 아내가 독백처럼 내뱉곤 하던 ‘죽고 싶다’란 그 말은 비수가 되어 내 심장을 파고들고 있었고, ‘내가 먼저 죽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본 바는 아니지만, ‘하느님을 배반할 수는 없다’란 마음은 아내나, 나나 똑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마 이때가 우리가 결혼한 이후, 가장 고통받던 시기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 시기가 우리 부부 에게는 인생의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참고 견뎌나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그리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있지는 않았다. 그렇게 어려운 현실과 마주하며, 깨금발로 버텨오는 동안 우리에게도, 실낱같은 희망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1998년. ‘걸’이는 4학년이 되어, 다른 과목과 함께 비행 훈련도 병행하고 있었다. 오후에 시행되던 그 훈련은 수색동 하늘에서도 목격되곤 했었는데, 구름과 함께 창공을 날고 있는 그 비행기를 볼 때마다, 우리는 앞으로의 희망을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었다. ‘운항학과’ 학생들의 일부는 조종사를 꿈꾸고 있는 아이들도 있기 마련인데, 나는 내심 ‘걸’이가 그것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의 청년 장교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조종사의 꿈을, ‘걸’이가 할 수 있다면, 나로서는 반갑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길이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나는, 하늘과 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걸’이의, 3학년 때부터 시작한 ROTC 생활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었다. 국가에서 예비 장교들에게 지급하던 장학금 덕분이었다. 매번 학기 때마다 납부하던, 등록금 면제는 나와 아내의 어깨 무게를, 엄청 가볍게 해주고 있었고, 또 ‘민지’는 3학년 때부터, 역시 50% 장학생이 되어 우리를 도와주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 아이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그들은 효자요, 효녀였음이 틀림없었다. 따라서 흘러가는 시간도, 우리에겐 조금씩 빠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해도 그렇게 거의 저물어가던, 12월 28일,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동생으로부터 전해 듣는다.     

엄마의 사망 소식은 우리에겐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향년 71세, 요즈음의 추세로 본다면 좀 일찍 가신 것은 사실이었으나, 평소 건강이 좋으신 편이 아니었던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항상 속을 끓여 왔었다. 평생을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는 빨리 하느님 곁으로 가기를 은근히 바라고 계시지 않았겠나 하고, 나는 생각하곤 했었다. 내세를 굳게 믿어 오셨든 어머니는 인간과의 지겨운, 그 관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지금쯤은 하느님 곁에서 편안히 계시리라 생각한다. 아무것도 생각 말고, 하물며, 자식들의 그 무엇도 생각할 것 없이 그냥 편히 쉬시기만을 진심으로 바란다. 이제 이 세상에서의 생활도 얼마 남지 않은 당신의 자식들이, 설령 당신을 볼 지라도, 그 인연의 끈은 잊어 주시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우리가 어머니에게 해준 것이 너무나 빈약하기가 그지없기 때문이다.

      

이어서 발생한 아내의 갑작스러운 건강 이상은, 우리 가족들을 바짝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었다. 연대 세브란스 병원 비뇨기과에서 밝힌 아내의 병명은 콩팥에서 발생한 ‘수신증’이었다. 두 개의 신장 중 이미 1개는 망가져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하였고, 나머지 1개의 기능도 그리 좋지 않은 상태라 하였다. 빨리 입원 수속을 밟으라는 의사의 지시를 따라, 우리는 부랴부랴 수속을 밟게 된다. 그때가 ‘걸’이의 졸업식을 불과 일주일 전쯤인 1999년 2월 말경이었다.

     

‘걸’이가 졸업을 했다. 엄마 아빠와 인연을 맺은 지 23년 만에,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성인으로 우뚝 서고 있었다. 졸업식은 성대했으나, 우리 가족의 자축은 간단했다. 그리고 조금은 우울한 분위기였다. 입원을 며칠 앞둔 아내의 건강 때문이었다. 아들의 대학 졸업식은 꼭 참석하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을, 막을 방법이 우리에겐 없었다. 입원 날은 며칠 미루어지고, 아내는 이렇게 아들의 졸업식을 함께하고 있었다. 이튿날 ‘걸’이는 ROTC 마지막 훈련을 위해 사천으로 떠나고, 아내는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입원을 위해 자신의 일을 제쳐놓으며, 도와준, 친구 ‘준호’와 함께, 나는 입원 수속을 무사히 마치고 수술을 기다리게 된다. 수술은 예정시간 8시간을 훌쩍 넘겨 무려 11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대기실의 전광판에는 아내의 이름만을 남겨놓은 채, 무심한 불빛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고, 나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그 초조는 이내 불안으로 바뀌고, 그 불안은 나를 불길한 상상의 세계로 나를 끌어가고 있었다. ‘준호’의 진심 섞인 위로의 덕분인지 아내의 수술은, 예정을 조금 넘기긴 했으나 무사히 끝나고, 아내는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 병동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병원에서 그토록 많은 시간과 정성을 바쳐 본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족의 안위에 목말라하는 남은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을 조금 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것을 느낄 수 있어서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수술을 하고, 입원을 하고 있는 동안 ‘걸’이는 무사히 훈련을 끝내고, ‘성남’에서 공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온 ‘걸’이는 엄마에게 장교 임관 신고식을 하고, 며칠간의 휴가에 들어간다. 그리고 며칠 후, 아내는 퇴원을 하고, 당분간 자택에서 요양을 하게 되는데, 나는 여전히 아내의 건강이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걸’이의 졸업이 임박할 무렵 우리는 수색동에서 이곳 녹번동으로 이사를 하며, 지하에서 지상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전보다 조금은 넓어진, 그러나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는 것 자체가 좋았었고, 우리는 이제 좀 더 높은 꿈을 꾸기로 작정을 한다. 이즈음 나는 내 생애에서 하느님이 점지해준 또 한 사람의 은인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김필태’ 씨였다.


 2. 희망의 나래

     

아내의 건강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고, 우리는 한동안 몰아쳤던 집안의 폭풍을 잠재우고 있었다. 공군 소위로 임관한 ‘걸’이는 이제 서서히 집과 우리를 떠나,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본격적인 비행 훈련을 위해 사천으로 다시 떠나 버리고, 이제 그 자리를 ‘민지’가 메우고 있었다. 기숙사에 머무르던 ‘민지’가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민지’도 이미 4학년이 되어 자신의 장래를 걱정할 나이가 되고 있었다. 이때 우리의 좁은 집에, 또 다른 애완견 하나가 더 있었으니, 그는 ‘홍실이’ 아들 ‘제왕’ 이였다. ‘홍실’ 이는 유일무이하게 새끼 한 마리를 낳았었는데 제왕수술로 낳았다 하여, 그를 ‘제왕’이라 불렀다.

     

내가 ‘김필태’ 씨를 만난 때가 이때쯤이었다. 그는 나와 ㈜ 한양의 쿠웨이트 현장에서 같이 근무하던 동료였으며, 육군 3 사관학교 4기 선배였다. 같이 근무할 당시는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근 20여 년이 지나고 만나 선지, 상당히 반가웠다. 그의 왜소한 외모와 작은 키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으나, 천성이 착하고, 선하여 보통 사람들과의 관계는 무난한 축에 속했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서로의 근황을 묻게 되었고, 나는 나의 처해있는 현실을 그대로 이야기하게 된다. 그도 지금 소규모의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불황 탓인지 몰라도 그 역시 지금 상당히 힘든 시기라고 하였다. 20대 후반에 만나 50대가 되어서인지 팔팔하던 그나, 나는 쓸쓸한 중늙은이가 다 돼 있었다. 나와 같이 일해 보지 않겠냐는 그의 제의에, 나는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고, 나는 그 어둑하고 습한 ‘유한 빌딩’의 지하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그와의 인연의 끈을 이어가며, 한 동안 한 우리에서 생활하게 된다.

     

한편, ‘아르헨티나’에서 돌아온 이후, 우리는 수색 성당으로 교적을 이전하였으나, 신앙생활과 기도 생활을 제대로 해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녹번동 성당으로 교적을 옮기고, 좀 더 신앙생활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1999년 당시 녹번동 성당은 불광동 성당에서 막 분리되어, 임시 가건물에서 마사를 드리고 있었고, 성당 부지 마련과 성당 건축을 위한 성금 모집이 한창 일 때였다. 이때, 아내 ‘소피아’는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직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일산에 있는 롯데백화점이었다. 시원찮은 나의 수입에 비하면 월등히 많은 아내의 수입이,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비록 집 한 칸 없이 셋방살이를 못 면하고 있는 신세였지만, 가족 전부가 건강하고, 희망이 있는 하루의 일상은 우리 모두에게 활력과 용기의 원천이 되고 있었다. ‘걸’ 이도 작은 소위 봉급이었지만, 집안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민지’ 또한 알바를 통해 얻은 조금의 수입도 보탬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지출은 적어지고 수입이 늘어나는 손익 분기점을 넘기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나 또한 전보다 나은 수입으로 가장으로서의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하고 있는 셈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리고 엉겁결에, 나는 성당의 성가대 지휘를 맡게 되고, ‘아르헨티나’에 이어 두 번째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성당도 어려운 시기였고, 나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성당을 건립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신부님이나, 나나, 최선을 다하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몸담은 ‘㈜상아 토건’ 은 강남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으며, 직원은 다 합쳐봐야 대여섯 명 정도의 소규모 건설회사였다. 비록 규모는 크진 않았으나, 알찬 회사였다. 수더분한 ‘필태’씨의 성격에 걸맞게, 회사생활은 사장과 사원의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녹번동에서 강남구청 근처의 회사까지의 출근은 먼 거리인지라 ‘필태’씨는 나를 위해, 차 1대를 배정해 주기까지 하며, 나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나는 이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회사를 위한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내가 하는 일은 수주를 위한 입찰이 주 업무였다. 당시 공공기관의 공사발주는 관보를 통해, 하고 있었고, 우리와 같은 소규모 회사는 개제 되는 관보를 일일이 확인하고, 그에 맞는 경쟁 입찰에 응해야만 했다.

 

요즈음에는 전부 디지털화되어, 사무실이나 집에서 손가락 하나로 모든 것을 진행시키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수작업으로 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 회사의 건설면허는 서울과 경기도였으므로, 서울만 하더라도 구청 수만 25군데이고, 경기도의 각 시군까지 합하면 꽤 많은 지자체를 커브하고 있는 셈이었다. 차를 운전하며, 그 많은 지자체를 찾아다니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열심히 나의 업무를 소화시키고 있었다. 입찰방식은 처음에는 ‘최저가 입찰’ 이었었는데, 공사의 날림 현상이 빈번하여 ‘적격 입찰’ 제로 바뀌긴 했으나, 경쟁은 여전히 만만찮은 편이었다. 그래도 가끔 소 뒷걸음에 쥐 잡듯이 수주하는 경우도 있어, 회사는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운영이 되고 있었다. 독실한 천태종 불교신자인 ‘필태’ 씨는 주말만 되면, 충청도 어디의 00사를 찾아가 108배를 올리는 등, 정성을 다하고 있었고, 나 또한 성가대 활동을 열심히 하며, 늘 기도하는 것은 잊지 않고 있었다.

      

2000년 2월. ‘민지’가 졸업을 했다. 섭섭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했지만, 일단은 우리 부부의 어깨 무게감은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벼워지고 있었다. 이로써 우리 아이들에 대한 교육 의무는 종료되었고, 다음 목표는 우리의 집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때 ‘걸’이는 일찌감치 조종 장교의 꿈을 포기하고, 일반 장교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오산 기지의 B.O.Q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주말이 되면 가끔 집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아내의 직장생활도 여전히 이어 나가고 있어, 우리는 슬슬 주위를 돌아보며, 적당한 집 찾기에 나서게 된다. 그때는 요즈음처럼 LTV와 DTI 같은 제한 조건이 없는 상태인 데다, 은행마다 서로 경쟁하듯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대출을 장려하던 때였다. 참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또 우후죽순처럼 지어지는 빌라와 맨션이 부지기수로 많아, 우리들 선택의 폭을 넓혀 주고 있어서 오히려 혼란을 초래할 정도였다. 때마침 눈에 들어오는 근처의 한 다세대 빌라가 있었으니, 바로 ‘태영 맨션’이었다. 5층짜리의 10가구 수용이 가능한 건물이었다. 방 3칸, 넓은 거실과 주방 그리고 채광이 좋은 일조권까지, 우리가 혹할만한 조건은 다 갖추고 있었으며, 분양조건도 괜찮은 편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우리는 이 집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제일 꼭대기 5층을 선택하였고, 널찍한 옥상 이용도 용이해 여러 가지의 이점이 많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우리 집을 놓치고, 서울에서 다시 우리 집을 찾았으니, 거의 7년만 이었다.

 

그때가 2002년 봄이었고, 그해 6월 에는 ’World Cup’ 축구의 함성이 한국과 일본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두 번째로, 민달팽이 신세를 면하였고, 성당에 적지 않은 건축 헌금을 바친 때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미국과의 2차 예선전이 열리던 그 날 이른 아침, 나는 출근 준비를 위해 침구에서 벗어나고 있었는데, 순간 찢어질 듯한 아랫배 통증에 나도 모르게 푹 주저앉고 말았다. 정신 줄을 놓을 정도의 통증 정도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내와 ‘민지’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고, 결국은 119에 의해 나는 병원으로 실려 가고 있었다. ‘앵앵’ 거리는 엠뷸런스 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지며, 나는 점점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신토불이’ 많이 듣던 말이다. 몸은 곧 흙이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네 몸은 결국 한 줌의 무기체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요즈음 들어 귀농이니, 귀어 귀촌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도시에서 시골로, 어촌으로, 산촌으로 많이들 돌아간다고 한다. 각자의 뜻이나 각오들은 제각각 다르겠지만, 하여튼 좋은 현상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 고령화로 인한 농촌의 인구감소 문제는 벌써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하니,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귀촌과 같은 이러한 현상은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돌아갈 곳이 없는 나 같은 도시의 부랑아들은 거저 부러워할 뿐이다. ‘歸’는 돌아올 ‘귀’로 떠났던 것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뜻인데, 그 ‘귀’ 자만 들어도, 왜 그런지 진한 흙냄새가 나는 것은 도시 출신인 나도, 나의 윗대를 훑어보노라면, 결국은 농촌 출신임은 맞는 말이다. 새들도 해가 저물면 그들의 둥지를 찾게 되고, 하잘것없는 미물들도 땅거미가 지면 제 구멍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천진무구하고, 순진 무쌍한 ‘천상병’ 시인은 우리가 돌아갈 그곳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본향이 어딘지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고, 모든 것이 덧없어짐은 나만의 느낌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어머니의 그 따듯한 자궁으로부터 분리되던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야 되지 않나 싶다. 그리하여 순백의 마음과 흠 없는 육신으로, 내세를 맞이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내가 눈을 뜬 곳은 ‘청구 성심병원’ 응급실에서였다. 통증과 함께 사라지려 하는 의식을 부여잡고, 버티기를 한참 후, 나는 ‘요로결석’이라는 진단을 받고서야 한시름을 놓고 있었다. 통증은 여전했으나, 큰 병이 아니라는 말에 다소의 아픔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 병원에는 결석을 부숴줄 분쇄기가 없다 하여, 나는 다시 119에 실려 강북 삼성병원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응급조치를 한 후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요로에 끼인 결석은 약물로도 이를 제거할 수 있다 하여, 아마 그렇게 처리한 것 같았다. 새벽부터 시작된 해프닝은 오후가 되어서야 끝이 났고, 한바탕의 난리굿은 별일 없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하여튼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모든 것이 서글프고 서럽다. 우선 몸 아픈 것이 제일 서럽고 사회로부터 격리 내지는 소외됨이 또 그렇고, 여기다, 요즈음은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도 버림 아닌 홀대를 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하니, 남의 일 같지 않게 적잖이 당황스럽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옛날에 비할 바가 못 될 만큼 복잡하고, 세분화 또는 전문화되어, 나이 든 사람들이 그 장단에 발맞추기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몸도 마음도 순발력은 떨어짐은 물론이요, 청력은 저하되어 물었던 말 또 묻게 되고, 어휘력 역시 아둔해지니 영락없는 반병신이 따로 없다. 세월을 그 누가 이길 수 있으랴.

     

집을 장만한 우리는, 2-3년 간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평안함을 누리고 있었다. ‘걸’이는 중위로 진급한 지 오래되었고, 여전히 오산에서 군 생활에 충실하고 있었으며, 벌써 자가용을 구입하여 가끔 집을 방문하고 있었다. 나이를 자꾸 먹어가는 것에, 대해 조금의 조바심이 나가도 했지만, 그보다도 ‘민지’가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민지’의 나이가 더 신경이 쓰임은 과년한 딸을 가진 부모로서 어쩔 수 없는 걱정거리가 아닌가 싶다. 벌써 ‘민지’는 27살이 되었고, ‘걸’이는 29살이니 이놈이나, 저놈이나 보기만 해도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필태’씨의 건강이 심상치 않음을 우리가 느낀 시기는 이때쯤이었다. 그의 가족 모두는 부산에 살고 있었고, 이곳에서 혼자 하숙을 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평소 건강관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거의 매일을 술과 담배에 몸을 맡기고 있었고, 자학적인 일상으로,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내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내가 부산 가족에게 연락하여, 가족들의 합류를 종용하기도 했으나, 왠지는 모르겠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급기야 어느 날, 출근하지 않는 그를 찾아 하숙집을 방문했는데, 아무도 없는 빈방에 혼자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하고,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는 ‘식도암’으로 진단받고 나서야, 비로소 가족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약 7개월이 지난 2004년 겨울, 그의 사망 소식을 나는 지인을 통해 듣는다.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은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그들 가족들의 이해할 수 없는, 가장에 대한 처사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처님의 자비가 그에게 듬뿍 내렸으면 진짜 좋겠다.


그의 죽음은 나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군대는 선배였지만, 그와 나는 동년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새롭게 만나 무언가를 같이 해 보자던 그와 마지막 몇 년을 함께 했다는 그 자체가 나를 우울하게 하고 있었다. 그의 명복을 빌고, 그가 나에게 베풀어 준 모든 것 보다, 더 많이 그를 위해 기도할 것을 약속해 본다.

      

‘필태’씨의 사망으로 회사는 자연 문을 닫게 되고, 우리는 각자도생의 길로 나서게 된다. 나이는 이제 60을 바라보는 55세가 되고 있어, 더 이상의 직장생활이 힘들다고 생각한 나는, 나이와 상관없이 오래도록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기에 이르고, 대형 운전면허를 취득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즉시 학원에 등록을 했다. 나이는 많지만 보낸 세월만큼이나 쌓인 경륜으로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노력한 끝에 드디어 대형운전면허를 손에 넣게 된다. 그때가 2005년 6월이었다. 1년 전 대위로 진급한 ‘걸’이는 이제 의무복무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으므로, 계속 군대 생활을 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젊은이들의 취업이 그리 원활하지 못하여, 장교들은 장기복무를 희망하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결국 ‘걸’이는 군 생활을 접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이제는 아비가 이래라저래라, 할 시기는 지났는지라, 자기 인생은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미 그의 나이도 30이었으니, ‘걸’이가 잘 판단하리라고 믿고 싶었다.

                      

 3. 평화 평화 평화

          

아침 밥상이 전 같지 않게 휘황찬란하다. 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남편 생일이라고 정성을 다해주는 아내가 무척 고맙기 짝이 없다. 어느 아내나 다 하는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날이 갈수록 이러한 아내의 배려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다 나이 탓이려니 싶다. 젊었을 때의 그 기분과는 또 다른 느낌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이제는 부부란 단어는 슬며시 퇴색되어 가는 것 같고, 동반자 혹은 친구가 더 정겹게 들릴 정도이다. 나는 요즈음 아내를 볼 때마다 하느님의 배려에 새삼 감사를 드리고 싶다.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부분이 아내이기 때문이다. 나를 가장 많이 이해해 줄 뿐만 아니라, 영원한 내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팔불출’이기도 하다. 모처럼의 평화가 찾아오고, 이제 아이들보다 아내와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니 팔불출을 넘어 구불출쯤 되는 것 같다. 아무려면 어떠랴! 그런데 이제 몸이 슬슬 아파오기 시작한다. 우리 둘 다. 여기저기가.

      

계획한 대로 나는 대형운전면허를 취득하고, 내가 일할 수 있은 곳을 찾기 시작했다. 신규면허임에도 불구하고 갈 곳은 많이 있었다. 우선 경험을 얻기 위해 마을버스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마포구의 00 교통에 입사하여 근무를 하게 된다. 하루 2교대로 운행을 하게 되는데, 오전반은 04;00-14;00까지 이고, 오후반은 14;00-24;00까지의 10시간 근무였다. 꽤 힘든 근무이긴 했으나, 해볼 만했다. 마침 ‘걸’이가 타던 승용차가 있어서, 큰 불편함 없이 출퇴근을 반복하며, 그럭저럭 일상을 잘 보내고 있었다. 처음 해본 이 생활이 익숙하진 않았지만 경험이라 생각하며 무난히 7개월을 근무하게 된다.

 그동안 ‘걸’이는 전역을 하게 되고, 사회로 복귀하기 전에 여행부터 간다 하며, 세계를 향해 배낭여행을, 기약도 없이 떠나버렸다. 이제 3 식구뿐인 집안은 정적만 감돌고 있었고, ‘민지’도 남자 친구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아내는 다니던 ‘백화점’을 그만두고, 취미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주로 가곡이나 이탈리아 ‘칸초네’ 같은 성악 교실을 다니고 있었고, 배드민턴 클럽에도 가입하여 운동도 수시로 하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서서히 노년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아이들 짝 맞추기에도 슬슬 신경을 쓰게 된다. 노년의 짙은 음영은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슬금슬금 다가서고 있었다.

     

‘레오’를 ‘민지’로부터 소개받을 때가 몇 년 전 이때쯤이었지 싶다. 2004년 5월 정도였었다. 참 그때는 ‘진영’이라고 불렀다. 큰 키에 덩치 또한 만만찮아 힘도 꽤 쓸 것같이 단단해 보였으나. 덩치에 비해 목소리가 굵지 않고, 말투가 우람한 체구에 맞지 않게 여성스러운 느낌이었다. 아마 사귀는 것 같이 보였는데, 그냥 친구라 하며, 호칭은 ‘오빠’라고 불렀다. 자세히 물어보기도 뭣하고 해서 그르려니 하고, 지나쳤지만 혼기가 찬 딸애인지라,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기야 그 나이에 남자 친구가 없는 것이 더 걱정이지 하며, 애써 신경을 끄고 말았지만, 좀 눈여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이번 말고도 한참 전에 ‘진영’ 이를 한번 본 적은 있었다. ‘상아 토건’에 근무할 당시 사무실에 레이저 프린트가 필요해서 ‘민지’에게 부탁했었는데, 그때 아마 ‘민지’와 같이 온 친구가 그였든 것 같았다. D대 컴퓨터 공학과에 재학 중이라고 하며, 아무래도 전공분야니까 프린트 구입에 도움이 될까 해서 같이 왔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때부터 사귀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암튼 좀 더 두고 보기로 작정을 했다.

      

2006년 2월. 다니던 마을버스 회사를 그만둔 나는 진짜 대형차인 45인승을 운행하게 된다. ‘한진’에서 운영하고 있는 KAL 리무진 버스였다. 시내 호텔에서 인천 국제공항까지 공항승객들을 운송하는 것이었다. 엄청 큰 버스인 리무진은 덩치는 컸었으나, 운전하기에는 너무나 편안했고, 급료도 만만찮게 많아 마음에 들었다. 주로 외국인 손님이 대부분이라, 신경 쓸 일도, 내국인에 비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나이가 문제였다. 나는 이미 60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 회사에서도 그 점을 우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심으로 이곳도 그리 오래 있지는 못할 것 같아, 근무는 하면서 건설회사 여기저기를 다시 알아보고 있었는데, 궁하면 통한다고 ‘동진레미콘’에서 연락을 해 왔다. 2006년 5월경이었다.

     

2006년 6월. ‘민지’와 ‘레오’의 결혼식은 중림동 성당 뒤쪽에 있는 ‘마리아 홀’에서 치러졌다. 양가의 가족들과 얼마 되지 않는 인척분들을 모신 가운데, 천주교식 혼인성사로 진행되었다. 성대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 앞에서의 의식은 엄숙할 수밖에 없었다. 흠 없이 깨끗이 성장해서 한 지아비와 결합하는 ‘민지’가 고맙고 대견스러웠으며, 그들의 앞날을 하느님에게 맡기며, 행운을 빌었다. 결혼 전 ‘진영’이는 결혼 조건(?)으로 제시한 천주교 입교와 영세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으며, 나는 기꺼이 그의 ‘대부’가 되어주었다. 우리 부부는 이렇게 고명딸이며, 양념 딸을 우리로부터 분리시켰다.


 우리의 깃털은 이렇게 떨어져 나가고 있었으며, 인생 석양의 음영도 더 짙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會者定離’라는 만고불변의 원칙은,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그렇게 다가왔다.     ‘민지’를 그렇게 보내고 찾아든 우리 집의 정적은 한동안 이어졌고, 드리워진 우수의 그림자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걸’ 이마저도 떠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으니, 우리 부부에게 다가서는 상실감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었다. 나는 ‘동진레미콘’에 근무를 하고는 있었으나, 주로 지방 현장으로 나가 있는 실정이라,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던 아내의 그것은 더 컸으리라 생각한다. 유럽과 세계 등지를 두루 섭렵하며 다니던 ‘걸’이는 ‘멕시코’ 삼성전자 현지 채용으로 출국 준비를 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그의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했었다. 우리의 둥지는 여백이 많아지며, 차츰 비어지고 있었으며, 집안에는 아내와 내가 떨어뜨린, 낡은 깃털들만이 흩날리고 있었다.

      

2007년 3월. 지방근무에 지친 나는 서울로 올라오게 되고, ‘동진레미콘’을 관두게 된다. 당분간 집에서 쉬기로 하며, 가끔 딸아이 집을 방문하곤 했었다. ‘민지’는 이미 아이를 가졌고, 배가 조금씩 불러오고, 있었다. 아내는 할머니의 몫을 준비하느라 바빴으며, 이제 곧 나도 할아비가 될 때가 왔나 보다 하고 생각하니, 헛웃음과 함께 반갑기도 하였다. 살아온 날들을 어디 내어놓을 수 있을 만큼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데, 세월은 흘러갔고, 또 태어날 손자는 그 세월을 떠다밀며, 아예 나까지 밀어내고 있었다. 큰아이는 ‘멕시코’에서 혼자 근무를 하며, 자주 소식을 전해오고는 있으나, 곁에 있지 못한 아쉬움은 상존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내년쯤 삼성전자 본사에서 연수가 있다 하며. 그때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려나 싶었다.

     

서울 후암동 성당에는 부설로 설립한 ‘복자유치원’ 이 있었다. 그곳에는 원생들을 등원시키는 25인승 버스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기사를 모집한다며, 인터넷 공고가 개제 되었다. 지방근무에 지친 나는 나이 때문에 좀 망설여지기는 했으나, 그 모집에 응했는데, 면접을 본 ‘글라라’ 원장수녀님이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내가 천주교 신자임을 확인하시고, 선뜻 나를 채용하기에 이른다. 나는 하느님이 계시는 성당에서, 또 천사들만 있는 유치원에서의 근무하게 되어 얼마나 쾌재를 불렀는지 모른다. 내가 일할 수 있는 마지막 직장이 바로 이곳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내 결심을 다져나가며 우선 하느님께 감사드렸었다.

     

나의 첫 손자는 2007년 가을바람이 제법 싸늘하게 불던, 11월 29일 우리에게로 날아와 안겼다. 그때 그 고물거리던 그놈은 이젠 머리가 굵어져, 내년이면 벌써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우리도 참 많이 살아왔고, 강산도 많이 변하긴 변했나 보다. 이제 딸아이도 어느덧 중년이 되었고, 사위인 ‘레오’도 이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우리가 그러했듯이 아이들 뒷바라지와 가정 꾸리기에 여념이 없다. 모두가 고맙고 특히 하느님의 나에 대한 특별한 은총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조금 전 딸아이와 사위가 전화를 했었는데, 우리 집 냉장고가 너무 오래되었다며, 바꾸어 주겠다고 한다. 손사래를 치며, 사양은 하지만 내심 고맙고, 반갑기도 하다. 이렇게나마 보내는 우리의 노후 생활에 우리는 거저 감사할 따름이다.

     

‘태영 멘션’에서 둥지를 마련하여 생활해 온 지 5년쯤 되었나? 우리가 살던 녹번동 일대가 주택 정비지구로 지정되며, 갑자기 동네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왔다 갔다 하는가 하면, 현수막과 플렌카드가 온 동네를 뒤덮기도 했고, 가끔 고성으로 다투기도 하는 등 부산하고 시끄러워지면서, 덩달아 아내까지 바빠지는 것 같았다. 아내의 말을 빌리면, 조합설립 관계로 그렇다 하였다. 하여튼, 재개발이 이루어진다면 나쁠 것은 없을 것 같아 내심 빨리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걸, 서로 조합장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나오고 그 추종세력들의 이권다툼으로 동네는 이전투구의 장이 되어 연일 요란하기만 할 뿐 사업의 진척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 문제는 결국 둘로 나누어진 패거리들의 소송전으로 이어지고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 그 두 패거리 중 한 곳에 소속되어 있던, 아내가 잘못 찍어준 내 ‘인감도장’으로 인해, 우리 집이 저당을 당하는 상황으로 비약하게 된다. 나중에야 이것을 인지했지만, 이미 나도 그 소송전의 한 복판에 들어가 있는 셈이 되고 말았다. 한참 동안의 고민과 노력으로, 결국 해결은 잘 되었지만, 나는 여기를 떠날 것을 결심하고 부동산에 집을 내어놓기에 이른다. 잘못 판단하면 은행 대출금까지 건지지 못할 지경에까지 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나를 엄습하기 시작했고, 나는 심각하게 이를 타개할 방법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이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도움을 청함은 물론이요, 꼭 잘 되리라는 믿음으로 아내와 나는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고의 노력으로 그 진흙탕을 무사히 벗어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인근 APT로 이사하게 된다. 그때가 2011년 봄이었다.

     

‘멕시코’에 근무하던 ‘걸’이는 2008년 국내에서 있었던 연수에 잠시 다녀간 후, 한몇 년 동안 잠잠하더니, 그곳에서 지금의 우리 며늘아기를 만났었다. 둘 다 나이가 과년한지라 우리는 둘의 결혼을 서두르라고 일렀고, 그 들도 서둔다고 서둘렀지만, 2016년. 그러니까 3년 전에 결혼식을 올렸으니 많이 지체된 셈이었다. 정동에 있는 ‘프란시스코’ 회관에서 역시 천주교 혼인성사로 이루어졌고, 며늘아기는 이듬해 ‘로사’란 본명으로 영세까지 받았다. 이듬해 2017년. 예쁘고 예쁜 친손녀 ‘미나’가 우리 앞에 선을 보였었고, 우리는 손자 1명에 손녀 2명으로 그 위세를 넓혀 나가고 있고, 아직도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큰아이는 지금 ‘멕시코’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며늘아기는 따로 자영업을 하며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다.

     

 둥지는 완전히 비었으나, 우리 부부는 어차피 그분이 우리를 부르실 때까지의 남은 생은 살아야 하겠기에 오늘도 변함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저기에 흐트러져 있던 깃털들을 먼지와 함께 깨끗이 쓸어내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처음의 그 둥지로 돌아가기는 힘들겠지만, 우리는 18세, 21세의 맑고 순박했던 그 마음으로 정화되어, 순백의 꿈을 다시 키우고 싶다.      

나는 ‘복자유치원’에서 무려 12년을 근무하다가, 2018년 11월에 완전히 일손을 털었다. 아마 하느님은 현실에서도 나의 손을 놓치기 싫으셨던 모양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나를 붙들고 계셨으니까 말이다. 올 6월, 나는 그토록 하고 싶었던 ‘글쓰기’ 클럽에 가입을 하고, 겨우 끄적거려 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해졌다. 바로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제 또 어떻게 나를 당신의 도구로 쓰실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언제나 기다린다. 설령 그것이 하늘로의 초대라 할지라도 기꺼이 갈 것이며, 하느님의 그 어떤 명령이라도 나는 기다리고, 그리고 응답할 것이다.     

“네! 주님 저 여기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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