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이는 무엇이며, 어르신은 또 무엇인가? 그것이 그것 같은데, 용도에 따른 쓰임 세는 조금은 다른 것 같다. 전자는 나이가 지긋이 든 사람을 가리킴이요, 또 후자는 그 사람들을 높여 부르는 호칭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두 단어는 결국은 동일한 맥락임이 분명한데, 이 사회가 풍기는 통념은, 실로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나는 얼마 전 한 언론매체를 통해 이 두 단어를 묘하게 각색하여 현실을 풍자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궐자의 생각을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경제적인 바탕에 따라, 그것이 구별 또는 결정되는 것이라 했다. 세월의 흐름에 몸 맡기며, 그럭저럭 살아온 우리 같은 무지랑이 서민들이야,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리오마는, 똑같은 노인들에게, 늙은이 또는 어르신 하며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서, 부름을 달리 한다는 것이, 듣기에 영 찝찝하기는 하다. 그렇다고 그것에 대해 딱히 반론을 재기하기는 좀 그렇고, 암튼 이 시대의 패러다임이나,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흐른다면 노인들로서는 어쩔 수 없지 않겠나 싶지만, 씁쓸한 마음은 쉬 가라앉지 않는다. 문득 나 자신은 어느 부류에 속할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면서 묘한 기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또 그 기사는 나이 드신 분들을 no人(노인)과 know人(노인)으로 구분을 지으며 오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채 사회의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노인들- 최소한의 사람다운 삶도 보장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을 일컬어 no人이라 분류하고, 머리에 담겨있는 먹물만큼, 깔고 앉은 경제적인 인프라도 넉넉한, 그래서 그 인격까지도 꽤 알려지며 주위의 저변을 넓혀가는 다수의 know人까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같은 늙은이들이요, 다 같은 어르신들이며
또한. 우리 모두의 부모님들인 것이다. 아울러 우리 역시 똑같은 전철을 밟아가고 있는, 미래의 그들임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어르신이냐, 늙은이냐를 왈가왈부하기 전에, 살펴봐야 할 점은,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져 고착되어버린 배금(拜金) 사상이다. 이것은 결국 인간경시로 이어지고, 이제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도덕관념과 소양마저 아예 무시되기가 일쑤이니, 더 이상 무엇을 탓할쏜가?
한 때는 그들도 혈기 넘치는 이 땅의 젊은이로서, 이나라 경제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왕성한 존재들이 아니었던가? 이제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할 늘그막에, 이리저리 쪼개어지고 분산된 사회의 안전망은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했고, 어르신 대접은 고사하고 늙은 퇴물로서 死藏되어 가고 있다. 그래도, 그들의 힘겨운 人生流泳은 어쩔 수 없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노년의 삶은 고귀하고, 그 어떤 것 보다 값진 보고이다. 함축되고, 훌륭한 그 어떤 단어로도 그들의 삶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농축된 땀과 노력으로 차곡차곡 쌓아온 그 경험의 결정체는 후대의 훌륭한 밑거름이 될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방관하고 무시하고, 또 내 팽게 쳐지는 오늘의 이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도대체 우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溫故而知新을 주장하던 공자가 통탄할 일이다.
No人이던 Know人이던, 늙은이이던 어르신이던, 그들은 존중받아야 할 존재들이고, 人生旅程의 선구자들이며, 우리를 善道로 인도하는 길잡이 들이다.
잃어버린 우리들의 이성을 되찾아, 더 이상의 방관과 그들을 향한 경시 풍조는 없어져야 하겠다.
왜냐하면, 인생 말미의 삶은 그 어떤 때 보다 중요하며, 우리 역시 그곳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2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