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 있었음에
Part 1 가난과 격동의 시대
1. 6·25 동란과 출생
북쪽의 김일성이 남쪽을 해방시킨다는 미명 하에, 이 땅을 전쟁의 포화 속으로 밀어 넣기 불과 열 달 전, 1949년 8월, 한여름 나는 이 세상과 조우하게 된다. 해방된 지 불과 4년. 기쁨과 혼란이 온 나라를 싸고돌며, 좌우로 갈라진 정치의 혼돈 속을 비집고, 나는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고향은 경북 김천이었으나, 나는 연년생인 형과 함께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나, 줄 곳 그곳에서 성장해 왔다. 이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성인이 될 때까지 대구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내 유년기와 소년기를 모두 대구에서 보냈다.
당시 아버지는 대구 전매청 산하 연초 제조창 전기 기술자로 근무하면서, 꽤 안정된 직장생활로, 가정을 꾸려오는 듯했으나, 곧이어 터진 동란으로 인한 사정의 급변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다. 비록 피난은 가지 않았으나, 전쟁을 치르는 일반 국민들의 삶이란 게 불 보듯 뻔하였으니, 우리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3년 동안의 전쟁 기간 동안 겪었든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심했지만, 대구라는 지역의 특수성 때문에 피난의 고행은 겪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한여름에 태어난 나는, 젖이 부족한 엄마를 만나, 항상 배고픔에 시달렸으며, 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어미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다 한다. 가뜩이나 전쟁으로 인해 물자가 턱없이 부족한 때 인지라, 우유를 구하기가 쉬울 리가 없었다. 쌀미음으로 우유를 대신하다 보니, 영양공급은 생각할 수도 없었으며 겨우 허기를 달랠 정도였다 한다. 본능에 충실한 어린 나로서의 이러한 사정은, 내 성격 장애로 이어져, 지금도 나는 상당히 급한 편이며, 조급증 또한 심한 편이다.
암튼, 전란을 겪은 나의 유년시절은 불행한 시기에 태어난 불운의 시대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누런 인화지 흑백사진 속에 박혀있든, 내 어릴 적 사진은 아직도 나의 뇌리 속에 남아, 작은 고통으로 지금도 아려온다. 앙상한 팔다리, 휑하니 꺼져있는 눈동자, 커다란 머리통 하며 뿔룩 나온 배는 더 도 덜도 아닌 ET 모습 그대로이다. 한눈에 봐도 영양결핍이 확실해 보이는 그 불쌍한 놈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비단 전쟁 탓으로만 그 책임을 다 미루기는 다소 무리가 있긴 하나, 전란을 겪으면서도 나를 있게 해 준 부모님의 그 어려움들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으랴? 나의 유년기에 대한 기억은, 제반 조건들에 의해 한계적일 수밖에 없었고, 사진이나 주위의 증언을 종합하자면, 내 밑으로 남동생이 또 한 명 있었는데, 3형제가 모두 백일해에 걸려, 동생은 죽고, 나 또한 거의 빈사상태에서 겨우 살아났다고 한다. 이 부분은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님에게 원망 섞인 푸념을 할 때면 수시로 써먹든 단골 메뉴가 되곤 했었다.
하여튼 이후로 우리의 형제들은 3남 4녀의 대가족으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현재는 2남 4녀로 각자의 삶들을 열심히 꾸려가고 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이 내 탓이 아니듯이, 이 모든 환난이 나 혼자만 겪는 것 또한 아니지 않으냐 싶지마는, 유년기에 겪었든, 비천과 가난의 역사는, 성장기를 포함한 성인이 될 때까지 이어졌으니, 시절 탓만으로 돌리기엔 그 설명이 부족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유년기 추억의 잡기장에는 이러한 잿빛의 우울한 기억만 있었든 것은 아니었다. 형과 나를 앞뒤로 태운 채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리든 아버지의 자전거와 그때의 그 상큼하고, 싱그러웠든 새벽 공기의 상쾌함은 잊을 수 없었으며, 기분 좋아 허허 웃으시며, 흐뭇해하시던 그때의 아버지 모습은 그 이후엔 자주 볼 수 없었던 슬픈 추억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목욕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던 그 시절, 연초 제조창의 목욕시설은 당시로써는 최신 설비로써 아무나 접할 수 없는 그곳을, 우리는 아버지의 백(?) 덕분으로 그곳을 이용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으며. 정문을 들어서면 푹 쩔은 담배에서 뿜어내던, 달짝지근한 그 냄새는 지금은 맡을 수 없는 영원한 추억의 향기로, 내 콧속 깊숙이 남아있을 뿐이다.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전후 수습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내 여동생이 태어나 우리는 드디어 2남 1녀란 남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2. 혼돈의 초등학교 시절
그때는 국민학교라 칭했던 초등학교 시절은, 나에게 무지개 같은 희망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회색빛의 암울한 분위기가 항상 우리 집안을 짓누르고 있었고, 도무지 벗어날 길 없는 가난의 그림자는 날이 갈수록 더 짙어져, 칠흑 같은 어둠만이 집안을 감싸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인한 우리 가족들은 차디찬 현실의 벽과 마주하고 있었고, 초등시절의 초입에서 맛본 내 인생 최초의 쓴맛은, 나를 비천의 경지로까지 몰고 가며, 비참한 현실의 경험을 톡톡하게 맛보게 했다. 기성회비를 납부할 수 없었던 나는 독촉하는 선생님의 강권에 못 이겨, 허구한 날 학교에서 쫓겨나 집과 학교 사이를 방황하며, 시간을 낭비하곤 했었는데, 그때가 3학년이었으니까, 불과 10살밖에 되지 않았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순간 모면을 위한 거짓말만 계속 늘어놓는 일이 전부였다.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거웠던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앞이 흐려오며, 그 시절의 내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진다. 하루 세 끼의 식사를 할 수 있는 몇몇의 부잣집 외에는 두 끼니 만으로도 감지덕지의 시대였으나, 이마저도 우리에겐 허용되지 않았었다. 우린 항상 주린 배를 달랠 수밖에 없었으며, 배고픔의 설움을 일찌감치 경험한 전후의 첫 세대가 아니었나 싶다. 엄마가 정성스럽게 싸준 도시락으로 즐거운 점심시간을 보내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운동장으로 나온 나는, 수돗가에서 물 몇 모금으로 허기를 달랠- 진짜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수밖에 없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한 반에 60명에서 70명 정도인 교실은 항상 빼곡히 학생들로 꽉 채워져 있었고, 열악한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향학열만큼은 요즈음 못지않게 후끈 달아올라 그 열기 또한 대단했었다, 선생님의 말 한마디도 놓칠세라, 귀 기울이며 받았던 교육의 그 집중력은 실로 놀라웠으며, 그 어렵고 모진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자식 교육엔 최선을 다하는 부모님들의 정성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지 않았나 싶다. 경쟁력 또한 만만치 않아, 석차를 다투는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우리들의 성적 얘기는 주요 화젯거리로 등장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배고프고, 가난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공부 외에는 달리 특별히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 결과 나는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것은 나의 훌륭한 무기가 되어, 나는 내 자존감과 함께 자신감을 회복하고, 서서히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난한 우리 집의 환경은 나의 성적과는 무관하게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급기야 우리는 가지고 있던 유일한 자산인 집을 팔고, 남의 셋집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그렇게 세월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3. 고난의 시작
이때부터 우리는 고난의 역사 속으로 침몰되기 시작했다. 셋방살이가 처음인 우리가 주인의 눈치를 보며, 설움의 곁방살이에 익숙해지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래도 처음 맞이한 그 집은 마당이 꽤 널찍했으며, 우리가 살 아래채는 마당 왼쪽 한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방 2칸과 부엌 1칸이 딸린 아래채는, 주인집의 본채와는 많이 떨어져 있어서 서로 간의 큰 불편 없이 잘 지낼 수 있긴 했으나, 그래도 내 집이 아닌 것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감수해야 할 숙제였었다.
주인집 딸인 근순이는 나보다 2살 정도 위였으며, 공부를 잘하는 모범적인 누나였는데, 돈이 없어 교과서 외에는 책이 없었던 나는 그 누나가 쓰던 참고서 같은 책을 물려받기도 했고, 때론 모르는 문제나 어려운 문제를 풀 때 누나가 많은 도움을 주곤 했다. 그 누나가 준 쓰든 참고서에 남아있든 빽빽한 메모 형식의 깨알 같은 글씨가,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고, 새 참고서를 산 반 친구들이 오히려 부러워할 정도로 나의 헌 참고서는 인기가 좋았다. 참 고마운 누나였었는데 나중에 이사를 떠나면서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게 꺼림 직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경북여고를 거쳐, 서울의 명문대학에 들어갔다는 소식만 풍문으로 들었을 뿐 더 이상의 소식을 듣지는 못했다. 자금 살아 계신다면 나처럼 이렇게 누나도 늙어가고 있겠지 하고 생각하니, 인생이 참 서글프기 짝이 없다.
그 집에서 내 남동생이 태어나고, 우리는 3남 1녀의 대가족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운전을 배워, 당시 막 출시된 시내버스를 운전하시게 되면서 그나마 끼니 걱정은 면하게 되고, 조금의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다. 그 시절 버스는 엉성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었으며, 미군들이 쓰다 버린 엔진에다 껍데기를 억지로 끼워 맞춘 그야말로 구닥다리에 불과했으나, 시민들에겐 꽤 인기가 좋았다.
아버진 그나마 운전기술을 배워 일찌감치 생업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행운을 잡은 셈이었다. 그때가 내가 4학년 2학기였을 때쯤이었다. 추석 무렵 불어 닥친 태풍 ‘사라’호가 남부와 영남지방을 초토화시키면서 많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간 것도 바로 이때였다. 도시빈민으로 살아가던 우리는 태풍의 피해와는 별로 상관이 없었으나, 참 아이러니하게도 태풍으로 우리는 사과 풍년에, 사과 벼락을 맞는 행운을 차지하기도 했다. 낙과가 발생한 과수원에서 헐값에 출하된 사과를 그해 가을부터 겨울 내내 원 없이 먹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 태풍의 잔재도 채 걷어내지 못했던 그해 겨울, 내 여동생이 갑자기 온몸이 퉁퉁 붓는 괴질에 걸리는 우환에, 우리 집은 또 한 번의 격량에 휩쓸리게 된다. 당시 7살이든 여동생은 상당히 순했었고, 하나밖에 없는 여식이면서 온 식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때라, 부모님은 물론이고, 형을 비롯한 우리 모두도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내린 결론은 ‘신장염’이었다. 뽕나무 뿌리가 효과가 좋다 하여, 아버지와 형과 나는 그 엄동설한에 뽕나무를 찾아 대구 앞산 밑을 헤매고 다니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겨우 찾아낸 뽕나무를 얼음 땅에서 캐내기란 쉽지가 않았으나, 동생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에 그것을 기어이 얻을 수 있었다. 그 뿌리를 푹 삶아 우러난 물을 마시게 했더니, 부기가 거짓말처럼 빠지며 동생은 금방 회복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퉁퉁 부어오른 동생의 얼굴과 함께 그때 그 추웠던 앞산의 찬바람과 볼을 파고들던 매서운 추위가 피부에 와 닿는 듯하다.
그해 겨울은 그렇게 지나가고, 우리는 또 하나의 새해를 맞이하게 된다. 5학년이 된 나는 학급 부반장에 당선되어 왼쪽 어깨 옆에 부반장 명패를 달고, 위세 아닌 허세를 부리고 다니기도 했었다. 물론 공부를 잘한 덕이기도 했지만, 반 아이들에겐 꽤 인기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막 입학한 내 여동생은 이 오빠를 상당히 자랑하고 다녔으니, 그때 나는 가장 행복한 소년 시대를 보내고 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만 흐르지 않음을 금방 증명해 주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몰락은 이미 시작되어, 2월 28일 일어난 대구 학생의거는 곧바로 3·15 마산 학생 의거로 연결되고, 이는 다시 4·19 혁명으로 점화되어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4. 변화의 시대
1960년 2월의 대구의 함성은 3월의 마산을 들썩였고, 4월의 전국적인 궐기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내 나이 12살 봄에 닥친 혁명의 물결은, 우리 모두를 휩쓸며 그 역사의 중앙으로 우리를 밀어내고 있었다.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지고 거리 곳곳에는 인파로 꽉 미어지고 있었으며, 구호를 외치는 행렬 속에서 나는 내 존재감을 확인시키는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느 날, 내가 속해 있던 데모 군중들이 남문시장까지 진출했을 때의 일이었다. 인근에 모여 있든 경찰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고, 곧바로 발사된 최루탄에 의해 우리의 대오가 잠시 흩어지기도 했었으나, 곧바로 돌과 화염병으로 반격에 나선 군중들에 의해 혼비백산 흩어지던 그들은, 더 이상 민중의 지팡이가 아닌 꽁지 빠진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곧이어 남문 파출소는 화염에 휩싸였고 우리는 함성과 함께 그곳을 한참이나 지켜보기도 했었다.
이러한 혼란은 한동안 계속되었으며,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발표된 이 박사의 하야 성명은 무지렁이 민초들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었다. 거리는 서서히 질서를 잡아가긴 했으나 그 후유증은 쉽게 가셔지지 않은 가운데, 우리는 학생 본연의 모습으로 학교로 복귀했다.
어수선한 분위기는 학교도 마찬가지였으나, 새 학년의 설렘으로 그것을 빠르게 극복해 나가고 있었다. 이 가운데 5학년 6반 새 담임으로 ‘방태곤’ 선생님께서 부임해 오셨고, 우리 반은 기대와 호기심으로 방 선생님과 첫 대면을 하게 된다. 뿔테 안경에 온화하게 보이시던 선생님은, 나이도 지긋하셨고 신사풍의 점잖은 타입이었으나, 어쩐지 조금은 병약해 보이시기도 했다. 우리는 다시 학교생활에 전념하게 되고, 사회는 나름대로 치유되고 있었으나 뭔가 틀이 잡히지 않는 불안함은 상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학교생활은 그런대로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고, 방 선생님의 가르침은 정체성을 키워나가는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수업 도중 이따금씩 얘기해 주시던 여러 가지의 말씀은, 어떤 지식에 비길 바 없는 산교육 그 자체로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전인 교육이었음을, 그때는 몰랐었으나,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선생님의 그 참 교육에 새삼 고개가 숙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훌륭하시던 선생님 가슴에,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생채기를 내는 일이 발생했으니 바로 ‘시험지 조작 사건’이었다. 부반장이었던 나는 선생님을 돕는다는 명목 하에 반장과 함께, 아이들이 작성한 시험지 답안지를 채점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방과 후 작업하는 그 과정에서, 나는 요즘 말로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우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를 믿고 일을 부탁한 선생님의 그 신의를 저버리고 내 사사로운 감정으로, 오답을 정답으로 정답은 오답으로, 정정해 가면서 실로 상상할 수도 없는 점수 조작을, 천연덕스럽게 행하였던 것이다. 참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그 일은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의 기억으로 남아, 계속 나를 괴롭혀 왔다.
이후 나의 학교생활은 다시 회색의 지난날로 돌아가 전전긍긍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실망에 찬 방 선생님은 나를 전처럼 대하지 않았으며, 반 친구들의 시선 또한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당연히 부반장의 지위는 박탈되었고, 위세 등등하든 나의 어깨는 힘을 잃고 자책감에 떨며, 나는 길고 긴 인고의 시간으로 추락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 사건은 나에게 엄청난 교훈과 함께, 영원히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하는 사건으로 내 오욕의 역사로 기록되고 있었다. 그렇게 그 사건도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지며, 내 초등학교의 생활도 서서히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무렵, 우리 집에서는 또 한 번의 풍랑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아버지의 정기적인 수입으로 그동안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안정기에 들어 모든 것이 평온하게 흘러가는 듯했었는데, 때 아닌 아버지의 늦바람이 가져온 불행은, 우리 온 가족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예 집을 나가 딴 여자와 살림을 차리며 집안을 돌보지 않았고, 어머니와 우리 4남매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며 이 난관을 극복해 내기에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형과 나는 현실과 맞부딪치며, 공부와 병행하여 생활전선으로의 첫출발을 감행하게 된다. 신문배달을 시작으로 돈이 되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낮밤도 가릴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우리는 절박한 상황을 견뎌가며 긴 고행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의 그 경험은 그 후의 혹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밑거름이 되어, 나를 더 단단하게 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어머니와 형과 나의 사투는 고난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어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생존전략을 스스로 터득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4·19 혁명의 그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의 가족들은 정신적으로도 또 조금의 성장을 계속하며 다음의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듬해 봄 6학년이 된 나는, 연이어 터지는 사회의 혼란스러운 변화를 예상하지 못한 채 중학입시를 당면과제로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 그래도 기본적인 실력을 조금은 갖추고 있었던 나는, 공납금이 적게 드는 공립 중학에로의 진학을 목표로 세우고 나름대로 부지런히 공부를 하며 꿈을 향한 발걸음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은 늦봄에 터져 나온 5·16 군사 쿠데타의 와중에도 아랑곳없이 이어져, 드디어 이듬해 봄 ‘경상중학교’에 입학하는 쾌거를 맛보게 된다. 비록 일류는 못 되지만 시골에서 수재들만 모인다는 꽤 괜찮은 학교여서, 나도 만족할 만하였다. 당장 들어갈 입학금과 교과서, 또 교복까지 많은 경비가 걱정이 되었으나, 아버지께서도 외면키 힘드셨던지, 도움을 주셔서 무사히 중학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군사정부 시절이라 모든 것이 획일된 교육방식에 따라 학교생활이 다소 딱딱한 면도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나, 특히 학생들에게조차도 ‘혁명공약‘ 같은 것을 암기하게 하고 그것을 강요하는 것들은 지금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입학한 ’ 경상중학교’는 대명동에 위치하고 있어서 집이 있는 남산동에서 통학하기에 적잖이 먼 거리였다. 특히 겨울에는 허허벌판인 논밭 지구를 1시간가량이나 걸어가야 했으니, 찬바람과 동장군의 매서운 바람은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그러나 배워서 꿈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결석 한 번 없이 3년간을 꾸준히 다녔으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대견했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집안의 사정은 조금 나아지는가 했더니, 다시 어려워져,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는 학업을 이어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석간신문만 배달하던 나는 수입을 늘리기 위해 조간신문까지 배달하게 되었고, 잠이 부족했든 나는 수업시간에 졸음과 싸워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견딜 수 없었던 것 중에 하나는 우리 반 아이들 집에까지 신문배달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그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던 그때의 일들을 잊을 수 없었다.
대구 역전 못 미쳐 있든 ‘시사 일보’는 조간이었고 ‘대구 매일신문’은 석간이었다. 조간신문을 다 돌리고 나면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이 식어지면 곧바로 오한이 찾아오기도 하고 때론 감기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지만, 남은 신문 몇 장과 바꿔먹던 염매시장의 뜨끈뜨끈하던 어묵의 그 맛은 참을 수 없었던 유혹 그 자체였다. 명덕 로터리 근처에 있던 ‘매일신문’ 지국엔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학교에서 바로 와도, 내가 돌릴 신문뭉치만이 제일 늦게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것을 대신해 줄 그 누구도 나에겐 없었다.
그러한 생활이 연속적으로 반복되고, 또 그만큼의 세월도 흘러 흘러 서서히 나는 나의 정체성을 키워나가며, 성인으로서의 발돋움을 또래 보담 조금 일찍 시작하게 되었다. 그동안 여동생이 1명이 더 태어나 우리는 3남 2녀로 점점 그 몸집을 불려 나가고 있었다. 아버진 집으로 복귀는 하셨으나, 대식구를 부양하기엔 역부족이셨고, 그날그날 끼니를 때우기도 힘들어하시며 전전긍긍하실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으셨는데, 설상가상으로 운전 사고로 인해 교도소에 수감까지 되신 후로는, 그 뒷바라지까지도 우리들 몫이었으니 참으로 힘든 세월이 아닐 수 없었다.
도지(요즈음의 전세)로 있던 돈을 빼어 다른 집 월세방을 전전하며 견디어 나가기를 수개월, 그 집마저도 대형교회의 신축부지로 수용되어, 진짜 우리들은 오갈 데 없이 길바닥으로 나 앉는 민달팽이의 신세로 전락될 지경에 이르게 된다.
5. 어머니와 민달팽이
내가 열 살 되던 해,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는 민달팽이가 되어, 내가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났던 1970년이 저물 때까지 우리는 집 없는 서러움을 안고 살았다. 내가 집을 떠난 이후에도 그 사정이 변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일단 집으로부터 벗어나 나 혼자만의 독자적인 생활을 시작했고, 그 생활이 가져다주는 관습에 서서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고생과 설움을 감수하시며 자식들과의 끈을 놓지 않으며, 그 모진 세월을 묵묵히 지켜 오신 우리 어머니의 삶은 그야말로 인고의 시간이었고, 고통의 나날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젊디 젊은 나이에 남의 집 곁방살이로 전락하여, 주인집 아주머니의 눈치를 봐가며 올망졸망한 아이들 건사하랴, 없는 형편에 허리띠 졸라매며 살림 꾸리랴 그야말로 고군분투의 어려운 때를 보내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무책임한 주색잡기와 폭력적인 행동은 어머니를 아예 지옥으로 내몰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고, 주먹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자 당신은 온몸으로 우리를 지켜 주기까지 하셨다. 심지어 질이 좋지 않은 주인아저씨로부터 희롱까지도 감수해야만 하는 고통까지 받아야 했으니 셋방살이의 설움은 겪어본 사람들만이 아는, 실로 말할 수 없는 뼈저린 아픔 그 자체였었다.
대부분의 주인네 들은 이러한 우리의 사정을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위로받기엔 우리로서는 너무나 절박한 삶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 맞이한 근순이 누나의 집은 그 부모님들도 온화하시고, 또 아래채가 뚝 떨어져 있어서 셋방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지낼 정도로 잘 지냈으나, 두 번째로 이사한 승도네 집은 방 자체도 열악하고, 주인집 내외도 젊었던 탓에 부모님들도 참 어려운 날들을 보내곤 했다. 그 집주인은 당시 대구 교도소의 교도관이었는데, 죄수들이 먹는 밥을 집으로 가져와 그 밥으로 닭을 키우고 있었다. 그 밥은 꽁보리밥만을 먹고 있던 우리가 보기 힘든, 쌀보리가 반반쯤 섞인 먹음직한 밥이었는데, 닭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정말 아까웠으나, 그냥 볼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은, 우리에게 가난의 비참함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주인집 큰아들 승도는 나보다 세 살 아래로 놀기 좋아하는 그 또래의 평범한 아이였으며, 유독 나를 잘 따랐고 그 어머니도 나에게 종종 먹을 것을 챙겨 주는 등 많은 호의를 베풀 곤 하셨다. 특히 학교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던 승도의 과외공부를 내가 맡음으로써, 나는 그 어머니에겐 특별한 존재로 각인되기도 했었다. 성적이 뚝 떨어져 있는 승도를 지도하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내 계획대로 승도의 성적은 차츰차츰 나아져, 나는 정말 영웅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었고 그 후로 좋은 날들은 계속 이어지기도 했었다. 숨죽여 지내시던 우리 어머니도 이때만큼은 기를 펴고, 나를 흐뭇하게 쳐다보시곤 했던 그 표정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어머니에게 해 드릴 수 있었던 최초의 효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생활도 오래가지 못하고 우리는 또다시 이보다 더 못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으니, 이미 나는 그때 중학교 3학년으로 승급하여 고등학교 입시 준비에 몰두할 때였다.
얼마 전 장모님을 하늘로 떠나보내며 잠시 들러본 대구의 모습은, 옛날의 까마득한 추억을 되살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이 변해 버렸지만, 그때 들어섰던 대형교회는 아직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어서 그나마 잠시 지난날을 회고하는데 도움이 되곤 했었다. 하여튼 우리가 이곳저곳을 다니며 살던 동네는, 당시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교회 재단의 끈질긴 회유로 대부분이 교회 부지로 수용됨에 따라, 또다시 ‘보헤미언’ 같은 방랑의 연속으로 이어져, 우리는 아예 변방으로 밀려나며 방 1칸짜리에서 6명이 생활해야만 하는 지경에 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야말로 숨 막히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그나마 식구들이 많다 하여 세 주기를 꺼리는 집들이 속출하면서 우리는 점점 도시의 천덕꾸러기로 전락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며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였으며, 해 뜨는 내일에로의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저녁이 가까워오면 그 좁디좁은 방으로 들어가는 게 싫어서 도서관이나 밖을 배회하기가 일쑤였고, 때로는 자취 생활하는 친구 방에서 밤을 보내기도 하면서 가난과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항상 나를 믿어주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가정을 지켜나가는 어머니의 가없는 사랑은, 나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때마침 출감하신 아버지도, 집안 사태에 긴급함을 알아차리셨는지 우리와 함께 걱정을 같이하며,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을 다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태도 변화를 가장 기뻐한 사람은 당연히 어머니이셨고, 눈물 마를 날 없었던 어머니의 얼굴엔 비로소 희미한 미소나마 조금씩 묻어나기 시작했다. 가끔 승도 엄마가 어머니에게 쥐어주던 몇 푼의 돈은, 어머니에겐 그 돈보다 더 큰 행복으로 다가왔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온 가족의 단결된 힘은 그나마 조금씩 효과가 나타나, 작은방에서 7명이 우글거리며 살던 그곳을 벗어나게 해 주었으며, 방 2칸짜리의, 비록 셋집이지만 발을 뻗어 잘 수 있는 곳으로 우리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며, 차츰차츰 세상에 머리를 뒤 밀기 시작했다. 당장 내 고등학교 진학 문제가 가족들의 관심사로 떠올랐으나, 경제가 뒷받침이 되지 않는 그 어떠한 상의나 연구도 아무 소용이 없는 공염불에 불과한지라 내 실력이 되던, 안되던 그것 또한 문제가 될 수가 없었다. 결국 가장인 아버지가 낸 결론은 진학 불가로 이어지고, 나는 또다시 좌절과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무책임한 아버지도 원망스러웠지만, 공부 잘하는 나를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의 실망이 나를 더 아프게 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학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나의 열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으며, 그동안 공부한 것이 아깝다 하시며 시험이라도 한번 봐 보라는 어머니의 제의에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당시 내 실력은 ‘경북고‘를 갈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고, ‘계성고’ 혹은 ‘사대부고’ 정도는 갈 수 있는 실력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5년제 공업 전문대학 토목과에 재학 중이던 형의 권유로 그곳 기계과에 원서를 내놓고, 시험 날짜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5년제 전문학교는 일본의 교육제도를 본떠 내어놓은 교육시책이 었는데, 중학을 졸업시켜 바로 고급 기술인으로 키운다는 계획하에, 초대 과정까지 교육을 이수시켜 고급 Engineer를 양성시킨다는 좋은 그림을 제시하며 많은 학부모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중에서 기계과는 특히 경쟁률이 상당하여 꽤 실력 있는 학생들이 많이 모여 실력을 견주기도 했었다.
물론 나는 당당히 합격하여 내 실력의 건재함을 증명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고 나는 나의 꿈을 접으며 세상의 냉혹함을 다시 한번 곱씹기도 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나의 인생 최초로 반전의 경험을 하게 된다.
6. 대학 그리고 종교
인생에서 반전이란 영화나 소설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실임을 나는 그때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당시 그 대학 토목과 교수님이셨던 ‘김경찬’ 교수님께서 우연이 입학처에 들렀다가 기계과 합격자 명단 중에 내 이름이 눈에 띄었던 모양이었다. 형과 나의 이름은 외자라서 남의 눈에 드러나기가 쉬웠다. 마침 그분은 형의 주임교수라, 형에게 내 이름을 대며 혹시 나를 아느냐고 물으셨다 한다. 시무룩하게 동생이라고 대답하는 형의 모습에서 교수님은 이내 대충 눈치를 채셨던 모양이었다. 그 길로 서무처로 가시어 도장을 주며, 자신의 급료에서 나의 입학금과 등록금 일체를 대납해 주시며, 형에게 격려의 말까지 아끼지 않으셨다 한다. 물론 그 돈은 나중에 갚았지만, 하여튼 이러한 반전에 힘입어 나는 일단 입학의 행운을 잡게 된다.
당시 공평동에 위치해 있던 ‘청구 공업전문대’ 기계과 제3회 1학년 학생으로 등록을 하고 미래를 향한 힘찬 출발을 시작했다. 비록 고등학교 1학년에 해당되었지만, 학칙에 따라 대학생의 제복에 단화까지 신게 되었으니, 당시 고등학교 1학년에 비하면 그 차림 자체도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두발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며 맨머리로 다니든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요소들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낱 사치스러운 어리광에 불과했으며 나의 학교생활은 핑크빛만이 아닌, 옅은 잿빛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반 아이들이 입고 있던 짙은 곤 색의 고급 교복이 아닌, 탈색된 채 싸구려 냄새가 물씬 나는 푸릇푸릇한 나의 교복은 항상 나의 기를 꺾어 눌렀고, 단화 대신 군화를 신은 나의 발은 그 열등감에 웅크리고 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듯 나의 전문대학 생활의 시작부터가 순탄하지 않음은, 앞으로의 행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고 그것은 차츰 현실이 되어 내 눈앞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공계 계통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교제비 또한 상당하게 소요되는지라 학부모들에게는 많은 부담이 아니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에 그리 밝지 못했던 부모님께서는 2명의 자식 학비 조달에 등골이 빠질 지경이 되어, 거의 빈사 상태에까지 이르러게 되고 말았다. 일 년의 세월이 그렇게 흐른 후 우리는 또다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고 그 선택은 나의 휴학 결정으로 결론이 나며, 내 인생에서 나는 또 다른 경험의 길로 들어선다. 1965년, 1학년을 수료한 나는 겨울방학과 동시에 휴학계를 제출하게 된다.
1년 동안의 짧은 캠퍼스 생활은 나에게 많은 꿈을 주기도 했지만, 그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휴학이란 굴레에 또다시 갇혀버린 나의 삶이 너무 불쌍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1년 동안 나에게 슬픈 기억만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고, 지울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평생의 멘토인 하느님을 만나는 중요한 계기가 나에게 찾아오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7 식구의 대가족을 불평 한마디 없이, 셋방 1칸을 선뜻 내어주셨던 주인 할머니는 열렬한 천주교의 신봉자였다. 슬하에는 아들과 딸을 두고 병든 영감님을 수발하는 힘든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고 살아가며, 진실한 삶의 태도를 우리에게 직접 몸으로 보여 주셨던 분이셨다.
그 아들 ‘요셉 씨’(나중에 나의 대부님)는 대구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경북 변방 어딘가에서 초등학교 교편생활을 하면서도, 서울의 모 대학을 목표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수재 형 청년이었으며, 딸 ’ 데레사‘는 우리 형과 동갑으로 나에게는 누나뻘이었으나, 간간이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내 생애 첫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느끼게 한 여인이기도 했었다. 그 할머니의 권유와 설득은 어머니 마음을 움직였으며, 어머니는 곧바로 우리 모두를 성당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 중에는 제일 먼저 내가 예비신자로 등록하고, 일주일에 네다섯 번 정도의 교리 수강을 위해 계산동 성당을 방문하며, 신자로서의 수련을 닦기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교리를 지도하시던 신부님은 ’ 이갑수’(나중에 부산교구 초대 교구장) 신부님을 비롯해서 ‘박도식’ 신부님, ‘곽길우’ 신부님 등이었으며 계산동 주임신부님 이셨든 ‘박상태’ 신부님도 간간이 우리를 지도하시기도 하셨다. 지금은 하느님 곁으로 떠나신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때의 그 열정과 하느님에 대한 목마름은 어느 때 못지않게 뜨거웠던 시절이었음은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뜻하지 않았던 하느님과의 만남은 내 인생 전체를 흔들기 시작하였고, 이때부터의 내 삶의 중심은 그분에게 초점이 맞추기를 다짐했지만 약해빠진, 나의 의지만으론 역부족임을 지금도 실감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은 일본과의 청구권 협정을, 전 국민의 심한 반대 속에도 이를 밀어붙이고 있었고 이에 저항하여 학생들이 들고일어나 소위 “한일 굴욕외교 절대 반대”를 외치며 ‘박정권’에 대항하고 있었는데 나는 4·19 혁명에 이어 5·16 군사 쿠데타를 거쳐 세 번째로의 이슈와 맞닥뜨리고 있었다.
결국 피해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8억 불의 경제원조로, 36년간의 수탈의 역사를 종결시킨 박정희 김종필 정권은 나중에 발생될 큰 소용돌이를 예상하지 못한 채 급히 협정을 마무리 지움으로써, 요즈음 일본과의 불협화음이 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 문제와 강제징용에 따른 배상금 판결 등의 빌미를 그들에게 제공하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역사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뒤이은 그 딸인 ‘박근혜’는 아버지의 과오를 덮어 버릴 듯한 사법 농단 까지 일으켰으니, 역사에서는 그녀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해 무덥던 여름 8월 15일 광복절이자 성모승천 기념일에 나는 ‘베드로’란 영세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하느님과의 동행을 약속하게 된다. 지금 남아있는 내 영세 사진은 그 더웠던 여름의 모습과 함께 나의 대부님 ‘요셉’씨와 지도신부 ‘모이세’ 신부님까지, 54년이란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증명사진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게 긴박하게 돌아가던 1965년도 서서히 저물어 가면서 나는 현실과 다시 마주하며 내 앞날에 닥쳐올 미래를 위해 다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바로 학자금 마련을 위한 일자리 잡기였다. 나는 과감히 생활전선에 나가게 되고, 곧바로 휴학에 들어간다.
휴학기간, 일 년 동안을 경험했던 칠성시장의 점원 생활은 나에게 새로운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 주기도 했지만, 현실의 벽이 그리 만만치 않음을 강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복학하게 되어, 야생에서 다시 온실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 온실은 옛날의 그 온실이 아님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고 주위의 제반 여건도 일 년 전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다시 찾은 교정은 나에게는 남다른 감회로 다시 다가오고 있었으며, 학교의 재단이 바뀌면서 ‘영대 공전’으로 개명이 되고, 캠퍼스도 만촌동으로 이전하게 되어, 그동안 걸어 다녔든 학교를 버스로 이동하는 불편과 교통비 또한 부담스럽게 되어 불만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새로 만난 친구들과 반 분위기는 좋았으며 나는 이곳에서 나의 평생 친구들과의 인연을 맺어나가게 된다. 교정은 청춘의 활기로 넘쳐났고 일 년 만에 돌아온 나에게 만물은 풋풋한 향기를 푹푹 뿜어내 나를 환영해 주었으며, 나 또한 에너지 넘치는 젊음으로 세상을 맘껏 내 품 안으로 받아들였다.
그동안 아버지는 서울로 직장을 옮겨 한 달에 한 번 정도 대구를 다녀가시며, 집안 형편은 풍족 치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학비 충당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고, 토목과를 다니던 형은 자퇴와 함께 영남고등학교로 학교를 옮겨 이듬해 졸업으로 학업을 마치고 군 입대 준비에 들어갔다. 나는 학업을 계속하며 가톨릭 학생회를 조직하는 등 서클 활동도 병행하면서 묻어 두었던 나의 끼를 서서히 발산하기에 이른다.
특히 대구 가톨릭 합창단의 입단은, 나에게 종교적으로 큰 획을 긋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앞으로의 종교 생활에 많은 보탬을 나에게 선사하게 된다. 당시 주로 효성여대, 계명대학, 영남대학 등의 성악과 학생들로 구성된 합창단은, 그 지휘를 맡으려고 각 대학교수들도 은근히 경쟁을 벌일 정도로 인기도 좋았으며, 그 실력 또한 뛰어나 KBS에서 초청공연을 할 정도였었는데, 이공계인 내가 그 오디션을 통과했다는 게 나를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 모른다. 물론 내 목소리 자체가 베이스 중에서도 가장 저음에 가까움은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 이후 나는 한동안 성악에 빠져 살게 되고 그 단원 중에는 사제도 배출되는 등, 자랑스러운 단체에서 좋은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게 되어 나의 정체성과 더불어 성장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나는 내 생애의 최고 황금시대를 구가하며 젊음을 마음껏 구가하는, 그야말로 Golden Hour를 맞이하게 되고 이 무렵 늦게 찾아온 나의 사춘기도, 그 빛을 발하며 자존감 회복과 함께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7. 형과 칠성시장
이쯤에서 나는 형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형은 싫든 좋든 간에 부모님 다음으로 손위였고, 이 어려운 환경을 나와 함께 온몸으로 해쳐 온 동료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형은 장손으로서 책임감만큼은 강하여 엄마의 마음엔 둘도 없는 보물이었다.
그러나 형은 병약하기 이를 데 없어서 항상 병을 달고 다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마음을 졸이게도 했다. 이러한 형과는 다르게 나는 좀 씩씩한 편으로 매사에 능동적으로 임함으로써 특히 엄마에겐 든든한 아들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 당시 어느 집안이나 다 그래 왔듯이 집안의 장자들은 부모님들에겐 각별한 존재로, 둘째와는 항상 층하를 두게 함으로써 장자의 위치를 공고히 해주곤 했다.
우리 집도 별반 다르지 않게 형과 나는 적당한 간격이 유지되면서 보이지 않는 선은 항상 유지되고 있었다. 형과 나는 연년생으로, 밖에 나가면 친구도 될 수도 있었지만 형은 물론이고, 부모님조차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내가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제대로 항상 존재했었다. 참, 많이도 치고받고 싸우며 지냈지만, 아버지로부터 돌아오는 회초리는 항상 나의 몫이었으며 나의 불만은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고, 그 쌓인 만큼 회초리의 양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도 내 편은 역시 엄마였으며 아버지의 회초리는 엄마에 읍소에 의해 다소 줄어들기도 했었다.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형보다 낫다고 인정되는 것은 학교 성적이 유일했었다. 엄마는 한 번씩 형의 학교와 나의 학교로 선생님을 찾아뵙곤 하셨는데, 다녀오신 그날만큼은 형의 존재보다 나의 존재가 더 드러나는 날이어서 나는 형 앞에서 우쭐거리기도 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칭찬을, 형 학교에서는 핀잔 내지는 각성을 요구받곤 했으니, 엄마의 그날은 천당에서 지옥으로 왔다 갔다 했다 하며, 엄마는 꽁꽁 여민 버선발을 벗으며 푸념을 늘어놓곤 했었다. 이처럼 형과 나는 기쁨과 슬픔을 부모에게 골고루 제공하며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오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에 어느 듯 세월은 흘러 부모님은 두 아들을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고 말았으니 이 또한 모든 몫은 부모님 것일 수밖에 없었다.
형은 이미 전문대학 토목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며, 아버지의 빠듯한 수입으로는 두 명의 학비를 충당하기란 거의 불가능했기에, 장남인 형님을 뒷바라지하는 것이 향후 집을 일으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 하고 생각하시며 부모님께서는 둘째의 학업은 중단하기로 결정을 내리신 것 같았다. 여기서 나는 둘째의 설움을 체감하며 묵묵히 그 길을 따를 수밖에 달리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우여곡절 끝에 이 고비를 넘겨 입학의 행운을 잡게 된다. 그 행운이란 전에도 언급했듯이 바로 ‘김경찬’ 교수님이었다. 그분에 대한 고마움은 내가 평생에 걸쳐 감사를 드려도 모자랄 만큼 잊지 못할 고마움으로, 항상 내 마음 밑바닥에 깔려있다. 그 인연의 끈은 형이었으니, 결국 형 덕분에 나는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형은 학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전문대를 자퇴하고, 일반 고등학교로 전학 후 그곳에서 학업을 마무리하고 만다. 이 또한 나를 위한 배려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렇듯 형은 집안의 장자로서 자신의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모범을 우리에게 몸으로 직접 보여 주었다. 지금 대구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형은 두 아들의 보살핌 속에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계신다.
전문대학 1학년을 마친 1965년, 겨울방학과 동시에 휴학계를 제출한 나는, 부모님에게서는 학비조달이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학자금 마련을 최우선 과제로 일자리 찾기에 집중했다. 결국 찾아낸 일자리는 칠성시장의 그릇 가게였는데, 침식을 제공해주고, 봉급도 제법 많은 곳이라, 얼른 승낙을 하고 당장 일을 시작했다. 그동안 중학교를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쭉 해왔던 터라 심리적인 위축감이나 비감한 그따위 감정은 들지 않았으나, 며칠 상간에 학생에서 그릇 가게 점원으로 추락한 내가 참 가엾기는 하였다.
그동안 집을 떠나본 적이 없던 내가 보따리를 챙겨 집을 떠나던 순간엔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 한걸음에 집을 빠져나오며 눈물인지 울음인지를 잠시 삼키기도 했었는데, 특히 동생들 3명과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던 그 눈망울에 순간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북받침은 더없는 고통이었다. 이렇게 나는 가족들과의 첫 이별 연습에 나서며 본격적인 혼자만의 사회 짠맛을 맛보기 시작한다.
‘火興商會’ 가게 이름이었다. “불같이 일어나 흥하게 되리라”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과 달리, 장사는 말 그대로 잘 되었으며 나는 그에 발맞춰 바쁘고 바쁜 나날을 보내며, 그해 겨울을 그곳에서 보내고 이듬해 봄을 맞이하게 된다. 내가 주로 맡은 일은 주문받은 물품을 운반용 자전거에 실어서 배달해 주는 것이었고, 아침에 가게를 열고 저녁엔 닫는 일이며, 낮에는 그릇들을 정리하기도 하면서 잡일을 하기도 했었다. 또 공장에서 입하되는 물건들을 체크하기도 하고 불량품에 대한 처리, 고객들이 가져오는 반납 품도 처리하며 장사업무 전반에 걸쳐 폭넓은 경험을 두루 섭렵하기도 했었다.
가게 문 닫는 것까지 하고 나면, 가게에 딸린 작은방에서 혼자 쪽잠을 잤었는데 그 방은, 방바닥은 지글지글 끓었으나 외풍이 심해 얼굴을 덮고 자야 할 정도로 추웠다. 주인아저씨는 호인답게 항상 웃는 얼굴로 나를 밝게 대해주셨고 내가 하는 일에 상당한 만족감을 표시하곤 해서 나도 꽤 기분 좋은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제일 견디기 힘든 것 중의 하나는 아침 가게 문을 열고 조금 있으면, 왁자지껄 떠들며 학교로 향하는 내 또래의 학생들을 보는 것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가슴이 아려오며 눈앞이 젖어오기도 했던 적이 있었으나, 어쩌랴 내 운명인 걸 하며 가볍게 넘기기가 일쑤가 되어가고 있었다.
월급을 받은 날에는 운반용 자전거를 타고, 남산동 집에까지 다녀오기도 하면서 나는 차츰 그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으며, 과거의 그 슬픈 기억들로부터도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내가 받은 급료는 한 푼도 쓰지 않은 채 그대로 적립되고 있었고, 나는 내년에 복학한다는 희망을 부여잡으며,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이듬해 봄이 채 가기도 전에 나에게 전해질 슬픈 소식을 전혀 예상치 못한 채, 1966년 칠성시장의 겨울은 모든 이들의 바람을 품에 안으며 불어 닥치는 삭풍과 함께, 서서히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